그대들 있음에 세상은 아름답다 지은이: 구인식, 구인득, 구제구 출판사; 청림 출판 제1장 힘겨웠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던 어른들의 말씀이 옳더라! 언젠가 한문시간에 배운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엔 재미있는 고사가 있다. 옛날 중국 북방에 살던 늙은이가 기르던 말이 달아났다. 그런 데 그 달아났던 말이 준마 한 필을 데려왔다. 그 말을 타다가 그의 아들 은 다리가 부러졌는데, 그로 인해 나가지 않게 되어 전쟁에 목숨을 구했 다는 이야기이다. 한문시간에 배울 때에는 그저 그런가보다라고 들었던 그 말이 지금의 나 에겐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말이 양 느껴진다. 아마도 그것은 지나온 나 의 삶이 바로 새옹지마의 고사를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 각이 든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3 때까지는 그리 어렵다고 할 수 없는 형편 속에서 살았다. 그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느 한 순간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하더니,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에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가 난뱅이들이 되어 버렸다. 우리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알고 있던 그 누구도 우리 가족이 그렇게 갑자기 어렵게 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모 든 불행이 온통 우리에게로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불행들이 있었기에 생활 속에서 고통을 참으며 노력하 는 자세를 배우게 되었고,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고 진학을 하는 과정 에서 나와 인득이가 조금은 특별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고등하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던 그 겨울에도 어김없이 대 학수학능력 시험에서 전국 수석자와 그밖에 고난을 이겨낸 인간 승리의 드 라마가 신문지상과 TV화면을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때 그런 이들을 동경 어린 시선으로 우러러보며, '나 같은 사람은 저렇게 되려면 멀었다'고 자조 적인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들처럼 TV와 신문을 비롯한 온갖 언론매체의 스 포트라이트를 받는 입장에 서 있다. 어디선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나처럼, 나를 부러워하며 동경하는 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무어라 형용하 기 어려운 느낌이 든다. 힘겨웠던 고3시절, 결과에는 상관없이 어서 수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 때 어찌 내가 이렇게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물론이고 아버지나 그 외의 나를 아는 어떤 이들도 예측 하지 못한 일이었다. 정말 새옹지마라는 말이 딱 어울리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 '새옹지마'라는 고사에서 는 길흉화복의 바뀜이 그저 우연으로 이루어졌지만, 나는 여기에 '노력'이 라는 단어를 더했다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실한 노력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런 길흉화복도 분명 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것들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 렸다고 본다. 무엇인가를 이루어지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가서는 그것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다. 나 역시 수험 기간 동안 최선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 대로는 열심히 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아버지와 내 쌍둥이 동생 인득이 그리고 나, 우리 새 식구가 통과한 힘겨 웠던 지난 몇 년, 그 고통의 시간들은 결코 쓰리고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 었음을 전해질 수 있는 울림 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세월은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선물꾸러미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우리처럼 소외된 이들 사이에서 어쩌면 너무도 평범할 이야기겠지만 내게 있어 우리 세 식구의 눈물을 되새겨야 하는 일은 눅눅한 고통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지난날의 내 모습으로 서 있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에게도 내 가슴에 닿았던 울림을 전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아직도 부족하기만 한 내가 감히 지난 일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가족이라는 돛단배와 세상이라는 파도 우리 가족은 세 식구이다. 나와 내 동생 인득이, 그리고 존경하는 아버지. 우리 집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며 알게 된 친구 분에게 큰돈을 빌려주셨다가 그 돈을 받지 못해서 부도가 났다고 한다. 여 하튼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신 건 기정 사실이었고, 그 이후 가족은 그때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우리 세 식구는 항상 신문지 위에서 밥을 먹었다. 그 위에는 언제나 밥그 릇 세 개와 반찬통 한두 개만이 올라와 있었다. 김치라도 있는 날은 나은 날이었다. 대부분의 식사는 김치도 없이 먹어야만 했다. 설사 김치가 조금 있다하더라도 아버지는 김치는 도시락에 싸야한다며 남겨 두시곤 했다. 우 리의 식탁이 신문지인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휑한 공간을 신문지면 에 빼곡이 인쇄된 깨알같은 글씨들이 대신 채워주었기에. 어쩌다 맛난 음식이라도 생기면 아버지는 조금만 드시고는 배부르시다며 자리를 물러나곤 하셨다. 우리들이 많이 먹게 하려고 그러신 것이다. 그러 면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한참 클 나이인데 이렇게 반찬이 없으니 아버지로서 정말 면 목이 없구나,"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얼마나 무안하고,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나같이 젊은 사람이야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지만, 아버지처럼 연세가 쉰이 넘은 데다가 몸도 편찮으신 분이 이렇 게 아무렇게나 식사를 하신다는 것은 정말 안 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났는 데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싸해지곤 하는 일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그때까지도 나는 무 의식적으로 냉장고에는 분명 맛있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냉장고엔 언제나 수돗물이 담겨 있는 물 통과 아침에 먹던 두세 개의 반찬 통뿐이다.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텅빈 냉장고를 망연히 바라볼 때의 심정이, 텅빈 냉장고만큼이나 공허해지는 나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다. 그 건, 실망감이라고 해야 할까? 먹을 것 하나로 이런 말을 한다고 이상하게 여길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상황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런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런 상황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흠칫 몸을 떨곤 했다. 어제와 오늘이, 또 다르지 않을 내일이 그저 길디긴 하루 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시는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없는 것 은 아닐까...... 그래서였을까? 보통 가정과는 달리 '어머니'의 존재를 모르고 사는 데서 오는 가사일의 고충 같은 것은 나에게는 거의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있긴 있었겠지만 느끼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언젠가 생물 시간에 '감각의 순응' 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예를 들 어 털스웨터를 입으면 처음에는 까칠까칠한 느낌 때문에 불편해 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털스웨터를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 로 되고 만다. 또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냄새가 지독하다고 느끼 지만 얼마 안 있으면 냄새가 나는지 안 나는지도 모르게 된다. 이런 것들 이 '감각의 순응'의 예인데, 나에게 있어서는 가사일이 그랬다. 사실 나에게 부과되었던 가사일은 빨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가 방 청소와 설거지가 있었을 뿐이다. 다른 대부분의 것들은 거의 아버지께서 하셨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설사 나나 인득이에게 부과되었다 해도 그리 어렵거나 귀찮아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치다꺼리들이 있 을 수 있다는 것이 어떤 때는 감사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먹을 반찬이 없 어서 그저 간장이나 고추장을 놓고 밥을 먹고 있을 때 이웃집에서 반찬거 리라도 가져다주면 그 반찬거리를 조리하고, 먹고, 치우는 과정은 하나의 행복이었다. 다시 말해서 나에겐 가사일의 고충을 따질 수 있다는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의 여력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에 다름 아니었다. 극도로 어 려운 상태에서는 그런 것들을 따질 겨를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지내다가 가끔씩 친구들 집엘 들를 때면 무언가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친구 어머니께서 사 과 등의 과일들을 가져다 주셨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난 친구와 함께 그저 식탁 앞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친구의 어머니께서 알아서 밥상 을 차려 주셨기 때문이다. 밥을 다 먹고 난 후에도 그저 식탁에서 일어나 기만 하면 되었다. 평소의 우리 집에서라면 밥상을 차리는 것도, 치우는 것도 모두 인득이나 아버지와 함께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 것들에 순응이 되어 어느덧 그것이 자연스러워진 나에게 가끔씩 친구네 집에서 겪게 되는 이런 경험들은 새로운 것들을 깨닫게 했다. 즉 나의 사정이 특이한 것이고, 친구 네 사정이 평범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알지 못 할 것이다. 그런 평범한 자정에서 자라는 그들이, 그들의 지극히 평범한 일 상이 얼마나 부러웠는지를.....,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 난 다시 내 생활로 돌아와 내가 처한 상황에 순응이 되어 버린다. 마치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회로가 내장되어 있기라도 한 듯이, 어쩌면 그런 무의식 중의 순응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견 뎌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같이 나의 삶을 남과 비 교하며, 내 처지를 순간순간마다 자각했더라면 그거야말로 생지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견디는 것은 결코 쉽지 만은 않았 다. 때로는 탈선의 길로 빠져들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공부도 때려치우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거기에 나에 대한 아버지의 기 대가 너무나 무거워서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 그런 때마다 잠을 잤다. 잠을 자면 당장의 모든 고민들을 잊을 수 있 었다. 그 습관이 나에게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머 리가 조금은 개운해졌고, 모든 일에 대하여 감정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나만의 괴로움이 있을 때마다 잠을 잤다. 수 업 시간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내가 학교에서 잠 을 자면 반친구들은 내가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그런 줄 알고 공부 좀 적 당히 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것이 나에겐 또 하나의 부담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내 유일한 탈출구는 잠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잠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때로 터질 것 같은 가슴에 서 나오는 느낌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던 것이다. 탈선의 길로 들어서 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은 누구 나가 아는 일이지만 순간에 가슴에서 솟구치는 말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평소 탈선이라는 것을 '이기적인 도피 행각'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자신이 해야 할 것들 회피하고, 극복해야 할 환경이 버거워 피해버리는 것 이며, 자신이 떠맡아야 할 어떤 것들을 다른 이에게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 져올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결코 자신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 니면서, 단지 한 순간 도피의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서 탈선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가 아는 대로, 머리가 느끼는 대로만 살아 갈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난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게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졌고, 모든 걸 마구 던져 버리고 싶었다. 내가 바라보는 나 자 신이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다. 난 그때마다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넷,......열을 세고, 다시 백을 세면 서 생각했다. ...... 그냥 여기서 이대로 무너진다면 그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잖아. 여 태까지 우리 가족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서로 마음을 합하여 세상이라는 험 난한 파도를 잘 헤쳐왔잖아. 조금만 더 가면 행복이라는 섬이 보일지도 모 르는데 여기서 우리 세 식구가 가라앉아 버리면, 여태까지 세상이라는 파 도와 싸우며 버텨 온 것들이 모두 허사가 되는 거잖아...... 세계사 시간에 배운 말이 생각났다. 세계 문명의 시발점은 모두 자연환경 이 좋지 못한 곳이었다. 그렇게 좋지 못한 환경이었기에 그것을 극복하려 고 사람들은 끊임없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문명이라 는 것을 창출해 낸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의 뜰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안락하고 좋기 만한 환경 속에서 자란다면 나태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끊임없 이 인간을 자극하는 그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면, 그 자극으로 인하여 좀더 발전적으로 변화하고자 노력을 기울이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약에 내가 보통의 편안한 가정에서 자 랐다면 분명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이 나를 계속하여 자 극해 주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로 이렇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참으로 거칠고 혹독하며, 예고 없는 절망감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거대한 파도다. 그리고 우리 세 식구는 그 파도 위에 떠 있는 한 척 돛단배다. 우리 중 누구도 모른다. 앞으로 그 파도와 또 얼마만큼이나 맞서야 하는지를.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이 한가지는 안다. 그 물결이 거셀 수록, 그 파고가 높을수록 오히려 그것을 나의 성자의 자극제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파도와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는 길이라는 것을. 머니(money)가 도대체 뭐길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 1년 넘게 줄이 끊어진 가방을 가지고 다닌 적이 있다. 중학교 때부터 쓰던 가방이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가지고 다녀야 할 책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 무게를 당해내지 못하고 끈이 그만 끊 어져 버린 것이다. 인득이의 것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등에 멜 수 없게 되어 손으로 들어야 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한 손으로 들다 보면 힘 이 배로 들어서 양손으로 번갈아 들었다. 그러다 학교에 도착할 때 즈음이 면 아예 가방을 안고서 교문을 지나야 했다. 남들은 다 책가방을 메고서 교문을 들어오는데, 똑같이 생긴 놈 두명이서 그렇게 가방을 안고 들어오 는 모습은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으리라. "너희들은 왜 가방을 안고 다니냐?" 하루는 교문을 지키시던 학생부장 선생님께서 우리를 계속 지켜보시다가 의아하다는 어투로 물으셨다. 그 물음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하면서 그냥 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얼른 교실로 달음질쳐 왔다. 그건 내게 자존심 문제라 여겨 졌다. 남에게 돈이 없어서 가방을 못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가방을 메고 1년도 넘게 학교를 다닌 것은 꼭 돈이 없 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냥 들고다녀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 문제 가 커다란 이유이긴 했지만, 만약 내가 가방을 사달라고 했다면 아버지는 분명히 넉넉하지 않은 돈을 쪼개서라도 사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께 그렇게까지 부담을 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학생인 나만하여도 돈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곤란을 겪는데, 아버지는 오죽하랴 싶었다. 순간적으로나 마 아버지를 위한다는 생각으로 한 일이었기에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어서 수치심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가방 사건과 같은 일들은 더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 장 고민했던 점은 그런 물질적인 궁핍함보다는 점점 닫혀만 가는 나의 마 음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공부 잘하는 아이는 교우 관 계는 안 좋다.'는 통념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난 교우 관계가 그럭저럭 좋았다. 문제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 생기는 거리감이었다. 일상 생활의 사 소한 것들 하나 하나에 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작은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야. 이번 주 일요일에 우리 명동에 가는 게 어때?" "왜?" "구두를 사야 되거든." "그래? 잘됐네. 나도 구두 하나 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럼 인식이도 같이 갈래?" 대화는 여기서 막힌다. 난 구두를 살 수 없으니 당연히 대화에서, 그리고 동행 길에서 제외된다. 또 친구들과 우루루 매점에 가서도 왁자지껄 먹고 난 뒤 계산할 때가 되 면 설사 돈이 있어도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돈을 이런 데 쓰면 안돼! 다른 아이들이 대신 내 줄 텐데, 뭘.' 내게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리는 몇 겹의 생각으로 복잡해지고 만다. 그런 후에 매점을 나오는 나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같은 것으로 온몸이 스멀거리는 느낌을 ...... 내가 자꾸만 돈 때문에 치졸한 인간으로 변하는 것만 같아 고민이 컸다.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런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또 그 렇게 되고 만다. 어는 한 순간도 나는 돈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깟 돈 때문에 순간이나마 비열한 짓을 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었다. 친구들 중 누구도 내게 상처를 주려고 일부러 들쑤시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일상을 나눌 뿐이었다. 다만 그 소소한 일상의 틈새마 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게 상처를 남겼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상처들 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란다는데 있다. 조금씩 조금씩 깊어지는 상처는 곧바로 친구들에 대한 거리감으로 변했고, 내 마음에는 하나둘씩 벽돌이 쌓여, 어느새 견고한 벽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외로웠다. 내가 겪는 이런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며 외로해 줄 수 있는 친구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나 혼자 외로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은 바보 같은 것이었다. 돌아볼수록 나에겐 내가 풀어놓기만 했 으면 나를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 친구들이 옆에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다. 여유가 없었던 탓이기도 했고, 그만큼 나의 마음이 옹졸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말씀을 남기신 최영 장군이나, 속세를 비웃 으며 소유한 것 없이도 세상이 마치 모두 자기 것인 양으로 사셨던 김삿갓 같은 분이라면 몰라도 우리 같은 범인들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 로 돈에 영향을 받는다. 돈에 의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기도 하고, 또한 그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열 아홉, 결코 어리진 않지만 또 그다지 많다고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 도록 살아오면서 돈에 대해 내가 느낀 것이 있다. 돈은 참으로 무서운 물 건이라는 것이다. 가끔씩은 누구에 겐지 모를 원망과 속상함이 뒤엉키기도 했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솟아나곤 했다. 그런 우울 함이 온종일 나를 따라 다니는 날엔 혼자 앉아, 돈에 대하여 초탈해진 의 연한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나도 위인들의 모습을 달자. 위인들은 대개 돈에 대하여 초탈한 이들이었 잖은가. 어쩌면 그 위인들도 나와 같은 과정들을 겪었기 때문에 느끼고 노 력해서 그런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된 것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들로 마음을 달래며 내 마음을 다스리려고 했다. 돈이 많 고 적고를 떠나서 중심을 잃어버린 채 돈에 의해 조롱 당한다면 그건 너무 도 초라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앞으로 살아나가는 동안 돈 때 문에 상처받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일이 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이것은 돈의 의미와 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이자, 돈 때문에 치졸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내 생활 속에서 번번이 갈등하는 동안 내 할 일은 바로 내 마음을 수양하는 일, 바로 그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터진 울음 내 별명은 '인상파'였다. 학교에서는 웬만하면 많이 웃으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헐거운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끼어드는 집안 걱정과, 눈앞에 있는 억압적인 현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많이 쓰다보니 어느새 인상쓰는 것이 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친구들과 이야기 할 때는 곧잘 웃다 가도 나 혼자가 되어 공부할 때가 생각에 잠길 때면 인상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인상을 쓰는 것이 늘상 버릇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많은 날 들은 내 안의 고민들이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비죽비죽 올라와 얼굴에 얹 혀진 때문이었다. 언제나 해저를 연상시키는 착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 아버지는 우리에 게 마음의 부담을 덜 주시려고 언제나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그 런 아버지가 고맙기도 했지만, 그 웃는 얼굴에선 아버지를 억지로라도 웃 어야만 되게 만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나와 인 득이도 웃음으로 아버지를 대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웃음은 공기의 낱알갱 이처럼 통통 튀어 오르는 밝고 가벼운 것이 되지를 못했다. 내게는 언제나 그 웃음 속에 가려진 아버지의 슬픔과 고통이 먼저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게가 되어 나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우리 세식구 모두를 짓눌렀 던 그 무게로부터 나의 일상은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날은 유독 더했다. 고등학교 2학년 초기의 어느 날, 어찌된 일인지 그런 고민들이 종일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무척이나 우울했다. 그때 나는 눈시울까지 뜨거운 기우리 밀려올 정도로 심한 감기 몸살을 않고 있 었다. 몸이 그렇게 아프다보니 자신감이 없어ㅈ다. 그리고...... 외로웠다. 내 가 너무나 작기만 했다. 평소에는 나의 포부이자 작은 소망이었던 '난 우리 집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내가 아버지를 도와야한다.'라는 생각이 그날은 엄청난 중압감으로 밀려왔다. 나 자신이 너무도 나약하게만 느껴져 도저히 그런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거기에 이런 나약한 나를 믿고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하자니 죄책감까지 느껴져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아득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그 막막함...... 그건 아마도 미래에 대한 절망감 이었으리라. 그러던 중 쉬는 시간에 한 아이가 와서 나에게 전화 한 통이 왔으니 교무 실로 가보라는 말을 전했다. 만사가 귀찮았지만 어쩔 수 없이 교무실로 갔 다. 예감이 안 좋았다. 교무실 물은 열기도 전에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강하게 스쳤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선생님께서 나를 보고 손짓 을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내게 귓속말로 말씀하셨다. "채권자들 같은데 너를 자꾸만 바꿔달라고 해서...... 계속 연결을 안 시키 려고 했지만 막무가내더구나. 심한 말을 하면 전화 끊어. 알았지? 응?" 그렇게 말씀하신 선생님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정신이 멍 해졌다. 학교에까지 전화를 하다니...... 불같은 분노가 솟구쳐 옴을 느끼며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 다. 물론 돈을 독촉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들은 이미 한갖 웅웅거리는 소리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전화를 받는 동안 나의 분노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변해갔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전화를 끊고 교무실을 나오는데 울컥 목이 메었다. 교무실의 손잡이를 돌 리는 내 손을 떨리고 있었다. 내 가슴 아주 깊이서 솟아나는 눈물을 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와 교무실 밖 구석진 곳에서 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동안 가슴에 쌓여 있던 울분이 일시에 터 져 버렸다. 눈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솟아 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를 꽉 물어 보았다. 악을 쓰며 눈물을 참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세 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아무도 내 모습을 안 보았으면 하는 마음 이 간절했지만, 쉬는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는데도 난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식아 왜 우는 거니?" 수업에 들어가시다가 울고 있는 날 보신 한 선생님이 안타깝게 물으셨 다.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는 울음에 잠겨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런 모습은 정말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셨는지 내 등을 두드리시고는 수업에 들어가셨다. 얼마 후 간신히 울음을 그치고서 고개를 숙인 채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 이 시작된 지 몇 분이 지났지만 다행히 교과 선생님께서는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친구들도 내가 운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울고 난 덕인지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지만, 세상사는 일이 너무도 어렵 게 느껴졌다. 산다는 건 이런 것일까? 다들 이렇게 사는 걸까? 다른 친구 들도 그렇게 슬프면서도 나처럼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는 애써 감추는 것일 까? 그런 걸까? 그래도 세상은 따뜻한 마음이 숨쉬는 곳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난 것은 인득이와 내가 중3때였다. 부도가 나고 나 서 아버지는 집이며, 타고 다니시던 차등을 처리해서 빚을 갚았지만, 모두 갚을 수는 없었다. 곳곳에서 채권자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끈질기게 우리에 게 빚독촉을 해왔다. 그들의 횡포는 날이면 날마다 계속 되었다. 주민등록 을 말소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구둣발로 방안을 짓밟았고 아버지에게 마구잡이로 삿대질을 하면서 덤벼들었다. 물론 애초의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 재무를 안 갚은 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니까. 그러나 돈을 빼돌려 놓고 고의로 안 갚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 어서 못 갚는 것인데도 그들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이유도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채무자는 이미 그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과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을 본 날은 아부 일도 되지 않았다. 일그러 진 분노로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아버지의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나도 미안했고,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인득이와 나는 갈 곳도, 방향도 없이 그저 빙빙 걷고 또 걷기만 했다. 그 감정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부도가 나자, 아버지가 사업을 하실 때 그 밑에 서 일을 하시던 분이 아버지에게 사기죄 누명을 씌워 고소를 했다. 그리고 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요구해 왔다. 그 사람은 아버지와 몇 년 동안 주야 로 같은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법분야에는 대단히 박식하신 분이어서 변호사도 고용하 지 않고 혼자서 서류를 구비하시고 재판 준비를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노 력으로 재판은 결국 아버지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 쁠 수만은 없는 결과였다. 돈 때문에 친하게 지내던 두분이 거의 원수지간 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건 인가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다. 그 과정들을 다 지켜본 나는 이 사회에 대한 분노감을 주체 할 수 없었 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돈에 의해서 매개된다. 그래서 돈은 모 든 가치척도의 기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배금주의 사상 에 물들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가야 하는 곳이,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 이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라는 것이 슬펐다. 돈 때문에 오 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됨 수도 있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될 수 도 있는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그런데 고2때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지하1층, 지상4층 건물 의 지하로 통하는 계단 입구에 있는 반지하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은 아버 지가 나가고 안 계셨고, 인득이와 나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건물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을 본 순간 우리 는 직감적으로 만나서 이롭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러나 그때 이미 인득이와 나는 건물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 에, 우리들의 방이 있는 지하로 내려가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막연한 초조감에 2층 창문으로 눈만 내놓고 밑에 있는 두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 그때 살짝 내려다보던 내 눈이 밑에 있던 두 명 중 한 사람의 눈 과 마주쳤다. 난 깜짝 놀랐다. 아마 그들도 그때 우리가 바로 자기네가 찾 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그들이 우리가 있는 2층으로 올 라오는 것을 보고 인득이와 나는 계속 위층으로 올라갔다. 맨 꼭대기 층인 4층에 이르니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숨었다. 그렇게 숨죽이고 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쿵쾅쿵쾅, 내 가슴의 고동 소리는 그 발자국 소리보다 몇 배나 더 크게 들렸다. 그게 들릴까봐 숨을 멈추고 우리는 오들오들 떨었다. '아. 그 짧은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주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리가 없었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결국 인득이와 나는 그들에게 들켜서 같이 건물 앞까지 나오게 되었다 마치 내가 무슨 죄 라도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 너희들 아빠 어딨어?" 그들이 물었다. "몰라요." 인득이와 나는 그들을 쏘아보듯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때 그들의 얼굴 에는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표정이 있었다. 안쓰러움을 가득 담 은 눈빛으로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너희들이 빚진 것도 아닌데 왜 너희들이 도망가니? 빚진 건 너희 아버지 야." 난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저씨 같으면 아버지가 빚져 있는 게 좋겠어요?" "하. 이럴 땐 정말 이일이 하기 싫어진다니까! 자, 돈이 이거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받아. 용돈이라도 해." 그들은 그런 말을 하며 내게 1만 원을 주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돌아갔다. 나와 인득이는 좀 얼얼한 기분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난 느꼈다. 원래 악하기만 한 사람은 없는 거라는 걸. 낳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과 그들의 마음속에도 동 정하고 사랑할 줄 아는 따뜻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채권자들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며 쫓기는 일들을 겪으며 여러 종류 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불신을 먼저 배웠다. 자칫 나는 그런 것들만을 보고 그런 마음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 갈 뻔했다. 그러나 이율배반적으로 그런 지독한 경험들 덕분에 오히려 대 부분의 사람들에게 배금주의 풍조를 능가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찾아와서 행패를 부린 채권자들이나, 뉴스에 나오는 악인 들도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좋은 아버지요, 좋은 남편이며, 자식일 것 이다. 그러나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다보니 어느 샌가 더 이상 양심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되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건 내 삶의 자세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거칠고 험한 상황에서 내게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자락을 보여준 누군가를 보고 내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불신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듯이, 나부터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또 다른 누군가가 세상은 아직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숨쉬는 곳임을 믿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 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민들레 홀씨가 퍼지듯 그가 또 다른 누군가의 가슴에 '세상은 아직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숨쉬고 있는 곳임'을 믿 게 해줄 수 있는...... 제2장 나의 수험생활 중간고사 성적표 고등학교에 올라와 처음 본 시험인 중간 고사의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었 다. 그때 난 성적이 잘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집안 사정의 급격한 변화로 불안한 생활 속에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 고 지냈기에, 공부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지낸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성적표를 받고 보니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반에서는 4등. 전교 에서는 22등이었다. 아버지께 그 성적을 어떻게 보여드리나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렸 다. 온통 아버지가 실망하시리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보여드리 지 않고 지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날 저녁 때 즈음 아버지와 길 위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아버지는 누구를 만나고 돌아오시는 길인 것 같 았다. 나는 머뭇거리며 아버지께 성적표를 보여드렸다. 벼락같은 호통이 떨 어지리라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면서. 그런데 조용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단 한 마디의 꾸중도 하지 않으셨 다. 오히려 서글픈 미소를 지으시며, '잘했다'라는 한 마디를 하셨다. 그리 곤 다시 어디론가 가셨다. 난 아버지의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 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좁은 소견 탓에 그 속뜻을 알 수는 없었 다.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렇게 며칠이 그냥 지나갔다. 아버지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으셨다.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불안은 있었지만, 어느덧 나도 성적에 대한 생각은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너희들 많이 힘들지?" 우리 둘을 앉혀 놓고 하신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들은 인득이와 나는 당황하며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는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하긴 아버지의 사업이 이렇게 외었으니 너희들 마음이 편할 리 있겠느냐 마는 ...... 그러나 인식아,인득아 . 이것만은 잊지 말아다오, 너희들은 아버 지의 희망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해도 너희들이 앞을 보며 살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사실 너희 성적표를 보고 나 서는 조금 실망스럽더구나. 그것이 너희들 책임이기보다는 이 아버지의 책 임이 크다는 것을 안다마는 ......" 아버지는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셨다. 사실 난 생각이 깊은 사람은 못 되 었지만 그런 아버지의 눈을 보니 아버지의 심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날 아버지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난 아버지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기며 생각해 보았다. 그 속에 담긴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 보고자 애쓰면서 말이다. 아버지는 우리를 걱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우리들이 겪 어야 했던 그 낳은 일들을 생각하시고는 혹여 고통받을까 해서 우리의 마 음을 위로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일들이 당신의 책임이라 생각하셨다. 우리의 공부에 대한 태만까지도 말이다. 우리에게 꾸중 한 마 디 하시는 데도 안쓰러움과 자책감을 느끼시는 아버지의 마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나의 가슴에 와 닿으니 비로소 내 문제점들이 보이 기 시작했다. 부끄러움에 물든 후회가 밀려왔다. 왜 진작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 난 아버지의 희망이다. 난 미래를 보아야 한다'라고 외치는 강한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마음속에 변혁의 불 씨가 번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마음의 결심이 선 후에는 열심히 공부했다. 물론 다른 일들도 열심 히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 당시 나의 하루 일과를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 과 같다. 우선 학교에는 8시까지 등교해야만 한다. 8시부터 영어회화방송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리반은 특별히 담임 선생님의 주관하에 자치적으로 그날 배 운 영어회화를 중심으로 쪽지 시험을 보았다. 10문제를 보았는데 일정 점 수 미만은 방과후에도 재시험을 봐야만 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필사적이었 다. 약 20개의 문장을 통째로 다 외웠는데 그것이 후에 수능시험을 보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능시험 문제 중에서 외국 어 영역에는 듣기 평가가 17문제나 출제되는데, 거의가 회화에서 쓰이는 상용어구들을 알아야 답을 찾기 용이한 문제들이다. 이런 부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이 쪽지 시험 준비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다. 그 때 나 는 학교까지 15분이면 도보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어서 매일 아침에 걸어서 등교했다. 난 그 등교시간을 방송 수업 예습복습 시간으로 활용했 다. 중얼중얼 그렇게 영어문장을 한참 외우다 보면 어느새 학교에 도착해 있곤 했다. 방송 수업과 쪽지 시험이 끝나면 정규 수업 시작 전에 약 30분에서 40분 정도의 자습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그날의 예습을 해두었다. 예습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예습을 하 지 않고 수업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면 그 것에만 최대한 집중하여 그 시간에 웬만한 것들을 다 소화하려고 노력했 다. 방과후에는 9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왔다. 문제는 자투리 시간의 활용이었다. 평소 아버지께서는 시간을 아끼는 자 만이 꿈을 이룰 수있다며, 일상 생활에서 단 1분 1초라도 아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해오셨다. 늘 그 말씀을 들은 덕분인지 나 역시 시간 활용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고, 1분이라는 자투리 시간이 결코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생활 속에서 듣는 말이 한 개인의 사고와 생활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가를 새삼 실감한 부분이기도 하다. 가장 버려지기 쉬운 부분이었던 쉬는 시간이나 화장실 갈 때 등의 자투리 시간들은 단어장을 들고 다니며 외웠다. 그건 집에서나 학교에서 공부하다 가 모르는 단어들만 모아서 적어 둔 것들이었다. 그런 덕분에 따로 영어 단어 외울 시간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이 소리를 들으면 많은 이들이 내 가 여유를 부리며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고교 시절의 그 수많 은 영단어를 어떻게 그런 짧은 자투리 시간들로만 외울 수 있느냐고 반문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자투리 시간의 참 위력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자투리 시간을 모두 모으면 상당한 시간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 다. 내가 약 한 달 동안 그 자투리 시간만 이용해 외운 영단어는 1천여 개 에 육박했다. 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면 미 처 기대하지 못했던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수학과 영어 실력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하시던 중학교 3학년 2학기부터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초부터 꾸준한 노력을 요하는 수학이나 영어같은 교과목은 쉽게 따라잡을 수가 없 었다. 우리 학교는 영어와 수학 과목에 한해서 분반제, 즉 잘하는 아이들로 한 반을 만들고, 못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한 반을 만드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때 어찌어찌해서 나도 잘하는 아이들 반에 있게 되었다. 그래 서 더 심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진도 따라가기에 급급할 때 다른 아이들은 진도를 앞질러 가는 것은 물론이고, 고등학교 1학년초부터 벌써 1학년 과 정을 다 끝낸 아이들도 있었다. 같은 양을 배우고 있어도 못 따라갈 판인 데, 이건 게임도 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매일 다른 아이들 은 나보다 훨씬 더 잘한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방법은 하나.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하루'로 할당받은 양은 똑같이 24시간이었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다른 방 법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을 잤고, 숙제가 있거나 과제물이 있을 때는 4시에 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능률이 잘 오르지 않았 다. 새벽 1시부터 잠잘 때까지 거의 반수면 상태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2,3시간 공부했다해도 그 효과는 정신이 맑을 대 30분 공부한 정도에도 못 미쳤다. 게다가 잠을 그렇게 적게 자다보니 수업 시간에 왜그리 잠이 쏟아지던지 꾸벅꾸벅 졸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연히 수업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 졌다. 또 늦은 잠을 청하니까 지각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반에 서는 지각왕이라고까지 불리게 되었다. 어떤 때는 1주일 동안이나 세수도 못하고 나온 적도 있었다. 머리에는 기름이 줄줄 흐르고, 까치집이 서너 개 지어있는 것은 기본인데다가, 손지문마다 희미한 검은 기름때가 껴있는 일 이 다반사였다. 우리 반에서는 지각한 아이에게는 원고지 10장 이상의 논설문을 쓰게 하 는 벌칙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담임 선생님께 제출한 원고지만도 아마 수 백 장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날이면 날마다 써낸 덕분에 어떤 때는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지각으로 인한 일들인지라 한편으로 는 쑥스러운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참으로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초조함이 불러온 무리한 계획인데다, 무지막지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에는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불안에 녹아 버리고 말 것 같았 다. 나 자신의 미래가 아득히 멀어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고, 아버지께 죄를 짓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공부였어도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다. 새벽 3,4시에 공부를 끝내고 잠시 밖에 나가서 맡는 그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 마나 상쾌한지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상쾌함과 동시에 밀 려드는 가슴 뿌듯함이라니........ 그건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행복감이었다. 그렇게 약6개월을 공부하고 나니 수학과 영어 실력도 많이 늘어서 전교에 서 손꼽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수학의 경우, 당시 나는 6개월 동 안 정석을 여섯 번이나 만복해서 풀었고, 정석외에도 문제집을 5권이나 풀 었는데, 이게 내 수학 실력의 초석이 되주었다. 그때의 노력으로 나중에 고 3이 되어서는 따로 일반 수학을 복습하지 않고도 쉽게 문제에 접근할 수 있었다. 영어도 웬만한 문제집은 모르는 단어가 몇 개 안 될 정도의 수준 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실력은 쌓여갔다. 드디어 한 마디가 지어지는 때가 왔다. 고등학교 1학년의 마지막 시험인 기말고사가 끝나고 성적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어느날, 종례 시간이 되자 담임 선생님이 성적표 한 뭉치를 들고 들어오셨다. 내 눈에는 온통 담임 선생님 손에 들린 성적표 뭉치만 들어왔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 서시더니 나를 보고 살짝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이번에 인식이가 2학기 전체 종합 석차로 1등을 차지했다. 어려운 환경 에도 잘 견디며 1등을 했으니 우리 모두 박수를 쳐주자." 우레같이 터지는 박수 소리. 모든 아이들이 날 위해 박수를 쳐주고 있었 다. 나의 얼굴은 상기되었고, 나의 마음은 뛸 듯이 기뻤다. 작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성취했다는 보람이 날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던 성 취의 기쁨을 그제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불안에서 출발한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생활은 나름대로의 노력을 거쳐 작은 '결실'을 맺으며 행복 한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은사라는 의미를 깨우쳐 준 나의 담임 선생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은 정맹수 선생님이셨다. 독일어 담당이 셨는데, 수업을 성실히 준비해 오시는 데다 열심히 가르치시기로 정평이 난 분이었다. 그분을 난 잊을 수 없다. 그분으로 인하여 참으로 소중한 시 절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선생님, 그분을 통해 난 많은 것을 깨 달았으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가 5월쯤이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떠난다고 발표했다. 밋밋한 우 리들의 일상에 수학여행은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해준다. 들썩들썩 기대감에 부푼 분위기. 나에게도 역시 그건 기다려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수학여행 경비가 일인당 거의 10만원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인득이 것까지 합친다면 20만원이 든다는 계산이 나오는 데, 우 리집이 그 정도의 돈을 마련할 형편이 안된다는 것은 번한 일이었다. 선택 의 여지도 없었다. 난 수학여행을 안 가기로 결정을 하고 있었다. "너희들 중에서 수학여행 안 갈 사람있나?없지?" "선생님, 저는 못 가겠습니다." 수학여행 가기 1주일 전쯤에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물으셨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설마 안 가는 아이가 있으랴 여기며 가볍게 물으셨던 것 같 다. 한 번쯤은 아이들에게 물어보는 게 더 좋다는 생각으로. 그런 선생님의 생각에 아랑곳없이 나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대뜸 "우리반에는 자기만을 위하는 사람은 필요 없어. 그런 식으로 행동하려면 차라리 학교에 안 나오는 것이 낫다." 라며 빠르고 냉정하신 어투로 말씀을 하시고는 교무실로 가셨다. 인식이 는 교무실로 따라오라는 말씀을 남겨 놓으시고서. 일순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는 교실...... 눈물이 핑돌았다. 수학여행을 안 가는 것도, 아니 못 가는 것도 서러운데, 담임선생님까지 저렇게 나오시 니 너무나도 서운하게 느껴졌다. 여하튼 난 교무실로 가게 되었고, 나의 사정 얘기를 들으신 담임 선생님 은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잘못 이해를 해서 그렇게 말씀하셨 다면서, 그때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화를 내신 이유는 이러하였다. 우리 학교에서는 수학여행을 안 가는 아이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게 하 는 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가기로 되어 있었던 5월달은 내가 한참 공부에 몰두해서 밤을 새가며 공부를 하던 때였다. 그런 나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시던 터라 선생님께서는 내가 그 기간 동안 공부를 하기 위 해 수학여행을 안 가는 줄로 미루어 짐작하셨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자신 의 이익만을 위해 반아이들이 우정을 돈독히 하고, 단합할 수 잇는 자리까 지도 피하려는 아이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설사 조금의 불이 익이 있더라도 공동체의 단합을 위해서는 감수할 수 있는 그런 아이를 원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렇게 오해는 풀렸지만 나의 마음을 그리 편하지 않았다. 면담을 끝내고 나오려는 나를 선생님께서 다시 부르셨다. "인식아. 수학여행은 어쨌든 가 는 방향으로 생각해 봐. 비용문제라면 내가 대신 내줄 수도 있으니 말이야. 알겠지?" 잊을 수 없었다. 나를 울렸던 그 말씀 위로 건네진 선생님의 따뜻한 눈 길...... 선생님에겐 물질보다 한 제자의 아픈 마음을 쓰다듬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결국 그런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께서 비용을 마련해 주셔서 인득이와 나 는 선생님의 돈을 빌리지 않고도 수학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었다. 그 선 생님의 마음은 내 가슴에 새겨져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에는 독일어 선생님이 바뀌어서 그 선생님을 그리 자 주 뵙지는 못했다. 그래도 가끔씩은 복도나 교무실에서 부딪힐 때가 있었 는데, 그때마다 난 생각과는 달리 재빨리 인사만 하고 물러나 버리곤 했다. 왠지 수줍기도 했고, 내가 아직 그분과 정면으로 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 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선생님과 마주 앉아 정담어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나누는 날을 기다려 본다. 난 그때까지 선생님의 눈에 부끄럽지 않고 나 자신의 눈에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도서관 근로장학생이 되어 풍족하지 못하다는 것은 종종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반드시 해야만 되는 최소한 의 것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인득이나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원을 다닌다든다, 과외를 받는 것을 부러워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홰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가정 형편이 어려웠으니 바란다고 해도 꿈도 못 꿀 일 이기도 했지만, 그 탓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께 받아온 교육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우리집 상황 에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남들은 다 갖은 것을 못 갖었다고 그리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종종 마음의 불편함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게 중 심을 빼앗을 만큼 심각한 문제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건 풍족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등록금 걱정은 결코 가벼울 수 없었다. 갑자기 어려워지게 된 우 리집 형편이 이제는 등록금조차 내기 힘든 지경에 이른 것이다. TV에서 보면 몇 십 년 전 못살던 시대에나 있을 법한 걱정이었지만, 그게 나와 인 득이에게는 실제였다. 등록금은 1년에 4기분으로 나누어서 내게 되어 있었 다. 맨 처음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내는 1기분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제2기분 등록금부터는 막막할 뿐이었다. 그건 우리에게 반드시 해야 될 일이었는데도 우리는 가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인득이와 내가 등 록금을 못 낸 채 그렇게 끙끙 앓으며 고민하는 동안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 지났다. 그런데 우리는 호출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어떤 선생님께서 우리 의 등록금을 선뜻 내주신 것이다. 그것도 무기명으로. 인득이의 등록금까지 합친다면 약 50만 원에 가까운 돈이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 게 하라'는 말대로 그 선생님께서는 우리도 모르게 그런 큰돈을 내주신 것 이다. 사실 난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이름을 밝 히는 일은 그분이 원할 것 같지 않아서 할 수 없다. 그때 역시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한 고비는 넘겼는데, 그건 말그대로 한 고비를 넘긴 것일 뿐이었 다. 등록금 때문에 힘겨워하던 나를 지켜보시던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심 정을 아셨는지 나를 학교 도서관의 근로장학생으로 추천하셨다. 나는 곧 근로장학생으로 발탁되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말부터는 등록금 걱정은 안 해도 되었고, 마음 편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 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도서관 근로장학생으로서 해야 했던 일들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점 심 시간이 되면 10분 안에 재빨리 도시락을 먹고, 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책을 빌리러 몰려오는 학생들에게 책을 빌려주고, 대출 기일 도장 을 찍어주고, 또 아이들이 반납하는 책을 받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러다 점심 시간이 끝나기 5분전에 열람실 의자를 정돈하고 쓰레기를 줍고 나면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은 끝이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면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약10분간 대출을 해주고 마감했다. 곧 있으면 열람실에서 1학년들의 자율학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반 친구들이 도서관 열람실에서 자율학습을 할 때, 난 도서관 사무실 에서 공부를 했다. 9시가 되면 아이들이 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갔다. 그 러면 나도 다른 아이들과 약간 다른 자율학습을 마치고, 도서관 바닥을 기 름걸레로 한 번 닦은 뒤, 책정리를 할 게 있으면 하고, 컴퓨터를 끈 다음 집으로 갔다. 이것이 도서관 근로 장학생이 할 일의 다였다. 근로장학생으로는 인득이와 나, 그리고 희재라는 친구까지 총 3명이었다. 우리는 이 근로장학생 일을 2학년 1학기 중반까지 했는데, 생각같아서는 2 학년 동안 내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서관의 규칙이 1학년만을 근로 장학생으로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서관에 그런 규칙이 없었더라도 내가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또다른 신입생들에 그 좋은 혜택을 주기 위해서는 그 자리를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겨 졌다. 다행히도 그때쯤엔 애초 발단이 되었던 등록금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전교 수석을 했고, 인득이도 삼천리 자전거에서 제공하는 천 만 장학회의 장학금을 받게 되어 등록금 문제는 자연히 장학금으로 해결되 었다. 약 1년여간의 근로장학생 활동 기간은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귀한 시 간이었다. 경제적인 도움도 도움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것들을 얻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나는 많은 책을 접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고, 소중한 친 구 희재를 만났으며, 작지만 아름다운 행복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 서고엔 학생들이 볼 수 있게끔 꽤 많은 문제집에 배치되어 있었 다. 당시 참고서나 문제집을 구하기 어려웠던 나에게 그것은 크나큰 축복 이었다. 난 그 책들로 공부했다. 제약은 단 하나, 모두가 보는 책이기 때문 에 책에다 글씨를 쓰면 안 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책들은 내가 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난 약간 해묵은 참고서들도 많이 풀어볼 수 있었다. 어차피 실력을 늘리는 데에는 새 책이나 1,2 묵은 책이나 그다 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참고서 말고도 많은 문학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때 읽은 책 들이 나중에 수능 공부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런 것 은 생각도 않고 그저 문학작품의 세계에만 빠져들었다. 임꺽정의 불같은 삶이며, 김유정의 <봄봄>에 나오는 소박하고도 정겨운 풍경들, 조세희가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서민들의 애환 등등 이런 것 들을 가슴으로 느끼는 것들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에 빠져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근로장학생은 겨울 방학 때에도 도서관에 나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 지 도서관 일을 해야 했다. 다행인 것은 도시락은 싸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라면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심 시 간이 되면 인득이와 희재, 나 그렇게 우리 셋이서 도서관 사무실에 있는 난로에다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 황홀한 맛이란 지금도 잊을 수가 없 다. 서로 한 가닥이라도 더 먹으려고 쟁탈전을 벌이던 일이 눈에 선하다. 따뜻한 사무실 뜨끈뜨끈한 라면 국물, 그리고 나의 소중한 친구인 희재와 내 동생 인득이랑 마음을 담아 나누던 정담어린 대화 ...... 어떤 것도 부럽 지 않을 포근한 풍경이었다. 고스란히 추억으로 자리할 일들이었다. 어느 날엔가는 학교에 가보니 운동장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간밤에 눈이 왔었던 것이다. 방학이라 아무도 밟지 않아 마치 하얀 천을 덮어놓은 듯한 운동장은 별천지 같았다. 그 순백의 설레임을 내가 처음으로 밟던 그 기분, 난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눈쌓인 운동장에서 신나게 눈싸 움을 했다. 다시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한 움큼 눈을 뭉쳐 마구 던지고 또 맞았다. 주먹만한 솜덩이가 공중으로 솟았다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희재의 얼굴로, 인득이의 머리로, 내 어깨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하늘로 고 개를 젖히고 아이처럼 웃었다. 지금도 가끔씩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다보면, 내 입가에는 나도 모르는 새 에 정겨움에 겨운 미소가 떠오르고, 난 살풋 봄햇살같은 회상에 잠기게 된 다. 240점이 정도면 4년제 대학은 가능하다. 종종 일관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의 목표를 위 해서든, 신념을 위해서든 잘 할수록 겸손히 더욱 노력하며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의 고교 3년중에서 가장 노력하지 않은 시기는 바로 고등학교 2학년 때가 아닌가 한다. 2학년 때도 자율학습을 하였는데, 사실 난 되도록 이면 집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이유는 도시락 때문이었다. 당 시 우리집 형편으로는 도시락을 싼다는 것 가체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집 에 있으면 간장 하나로라도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도시락은 좀 달랐다. 적어도 김치 정도는 싸가야 되었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학교에 남아 자율 학습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나를 구속 시켜 주었기 때문에 공부를 내 생활의 중심에 놓는데 도움이 되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긴강이 풀어진 채 수습되지 않는 것이었다.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올 때 1등으로 올라와서 그런지 나는 목적의식 같은 것이 없었다. 대충 공부해도 한 번 올라온 1등의 자리는 잘 내려가지 않았다. 1 년 반 뒤엔 수능 고사라는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그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로만 느껴졌을 뿐, 당시의 나를 전혀 자극하지는 못했다. 자율학습시 간에도 조는 날이 잦았다. 공부가 하기 싫어질 때도 많았고, 그럴 땐 주로 문학 책을 읽었다. 그렇게 고등 학교 2학년의 상당 기간을 그럭 저럭 공부를 아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부에 매진하는 상태도 아는 채 허무하게 보냈다. 그때의 나에게는 사실 약간의 자만심이 있었던 것 같다. '천재는 99%의 노 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에디슨의 말처럼 천재는 노력에 의 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성실한 삶의 대가는 곧바로 나에게 찾아왔다. 고등학교 2학년으로서는 마지막 무의고사를 보았는데, 240점을 맞았다. 반에서 3등이었다. 황당했다. 그런 점수를 받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240점? 이 점수이면 4년제 대학은 가능하다."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자극을 주려고 일부러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서울대 법학과를 목표로 하고 있던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자각하게 되었다.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공부에서만큼은 정 말로 무서우리 만큼 제대로 적용하는 말 이 아닐까 싶다. 노력의 대가는 냉정하리만큼 정확히 나타난다. 다행히 나는 실망하고 포기하지는 않았다. 새삼 '새옹지마'의 교훈을 생각 했고, 다시 힘을 추스리고자 애썼다. 어쩌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이와 같 은 교훈이 있었기에 3학년으로 올라가서는 열심히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 다. 남을 위할 줄 아는 이,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좋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정말 고민이 많은 때이다. 항상 보호만 받던 한 존재가 스스로 자신의 미래가 걸린 일을 정해야 되고, 또 그렇게 인생의 중요한 무언가가 결정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앞을 보면 수능이 떠억하고 버티고 있어 중압감에 짓눌리고, 자신을 돌아보면 주의 의 기대에도, 자신의 기대에도 못 미치는 한낱 작은 존재만은 발견하게 된 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알게 되니 고통스럽고, 앞에 놓 여진 것들이 두려워서 포기하고 싶어 질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여태까지 많은 이들이 그런 마음의 고통을 대한 민국 고3의 업보인 양 여기며 겪어 왔고, 또 많은 이들이 겪게 될 것이다. 이 때 친구라는 존재는 비교할 것 없는 커다란 위안이 될 수 있다. 때로 는 라이벌로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동반자로서 함께 행동하며, 서로의 발 전을 꼬라는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나를 지켜봐 주는 누군가가 내 옆에 서 있다는 것, 그건 분명 삶의 반짝임 일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고3시절 내내 나의 옆자리에 앉아 내가 힘들 어 할 때마다 나를 위로 해주던 우연이가 바로 그이다. 우연이는 내가 힘 들어 할 때면 말 하지 않아도 알아채고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묻곤 했다. "인식아, 무슨 일 있니?" ......인식아, 무슨 일 있니...... 난 우연이의 그런 질문들에 대해 한 번도 속 시원히 대답해준 적이 없다. 나의 마음은 너무나 꽁꽁 닫혀 있었기 때문이 다. 그렇지만 우연이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내 생활에 버팀목이 되어 주 곤 했다. 내가 흠들 때 언제나 날 위로 해주는 친구가 항상 옆에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우연이는 알고 있을까? 내가 그 애로부터 얼마나 큰 위안을 받고 있었는지를...... 누군가 내게 우연이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을 할 것 같다. '그 친구는 남을 위할 줄 아는 이'라고. 우연이가 내게 그랬듯이 나도 우연이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는지 나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난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내 친구 우연이. 그에게 고마운 만큼 그를 배우고 싶다. 내가 남을 위할 줄 아는 이로부터 따뜻한 위안을 얻었듯이 나도 그런 사람 이 되어 그의 옆에서 있기 위하여. 희재는 도서관의 근로장학생으로 있을 때 같이 일하던 친구이다. 그를 만 나면 언제나 내가 먼저 장난스럽게 툭툭 치며 말을 건다. 그러면 기다렸다 는 듯이 우리 우리의 본격적인 장난이 시작되곤 한다. 그럴 땐 언제나 까 르르 웃음소리로 둥둥 떠오를 듯한 유쾌한 가벼움을 우리 주위에 머물곤 했다. 늘상 그런 줄만 알았던 희재를 새롭게 알게 된 일이 있었다. 그날 나는 고민에 싸여 혼자서 운동장 나무 그늘 밑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 서 오는 희재를 보았는데, 장난칠 기분이 아니어서 그를 피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어서 힘없이 '안녕' 한마디를 했다. 그런데 희재 는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챘는지 장난을 걸지 않았다. 그러 더니 그냥 내 옆에서 말없이 걸어주는 것이었다. 얼마를 그렇게 걸었을 까? 어느 덧 나는 나도 모르게 희재에게 조금씩 고민을 풀어놓고 있었다. 희재가 너무도 편안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희재의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녀석에게 이 런 모습이 있었나?'하는 생각을 하며 희재를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에 정말 로 귀를 기울이는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가슴이 벅찰 수가 없었다. 내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며 그토록 진지하게 들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희재의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는 것이 기뻤다. 친구 들 가려가며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희재는 정말 친한 친구가 될 자격이 있 는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이야기를 하다가 희재를 툭치며 말했다. "놈, 꽤나 진지하게 듣는데? 너같지 않아." "뭐? 나야 항상 진지하잖아." "그 반대겠지." "뭐?" 그리고는 평소처럼 다시 쫓고 쫓기는 장난질이 시작되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친구 희재, 고마운 녀석. 그런 일이 있은 후에는 희재와 자주 진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물론 나의 고민을 전 털어놓지는 못 했다. 나의 닫혀진 마음이 일시에 열릴 수 는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일부분의 고마움을 나누는 과정에서 다른 고민 들도 저절로 풀려가거나 고민의 정도가 작아지곤 했다. 그게 바로 친구의 힘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매시기마다 내게 힘이 되 주었던 친구들이 있다. 어릴 때 동네 골목에서 같이 콧물을 흘리며 뛰놀던 죽마고우 진형이와 환진이, 중학교 때 한 반에서 우정을 나누던 영엽이와 영섭이...... 고교 시절에는 내 앞을 추스리기에 바빠서 자주 볼 수도 없었고, 서로 생각하고 위해주는 것 은 조금은 소홀했던 것 같다. 어쩌면 서운함이 고여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러나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난 안 다.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고, 언제고 만나고 싶어지는 이들, 내겐 너무도 소중한 친구들이다. 이렇게 나에게는 날 위해주는 친구가, 내가 위해주고 싶은 친구가 여럿이 있다. 많은 이들과 친하게 지내도 진정으로 친하지 않다면 그것은 별 의미 가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진정한 친구가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 축복에 감사하며, 내 소중한 보물들, 친구들에게 이런 말은 하고 싶다. 고맙다고, 진정 남을 위할 줄 안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내가 변해 가는 내 모습을 지켜봐 달라고, 그리고 우리의 우정 변치 말자 고...... 뉴스에서는 사회가 메말라 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또 나는 힘겹던 고교 시절 동안 사회의 더럽고 치사한 측면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난 우리 사회엔 아직 도처에 정이 남아 있으며, 그런 것들을 덮고도 남을 남한 고마운 이들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남을 위할 줄 아는 이들이 더 많기에,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도록 만드는 내 친구들이 살고 있기에 우리 사회는 아직도 따뜻한 곳이라 말하고 싶다. 할머니, 그리움으로 남은 마음속의 어머니 고3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어느날, 윤리 과목을 담당하고 계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효'부분을 가르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할머니, 할아버지를 공경할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너희들 중에도 집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사람도 있고, 그 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텐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사람은 좀 잘해드렸 으면 좋겠다. 깁에 가면 조금 피곤하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가서 학교에서 있었 던 일도 말씀드리고, 어깨도 주물러 드려봐. 참 좋아 하실 꺼야. 그렇게 하 다 보면 너희들에게 쌈지돈을 풀어 용돈을 주실지도 몰라. 그런 돈은 사양 하지 말고 받았다가 언제 때를 봐서 담배나 과자를 사다 드리는 거야. '할 머니, 할아버지, 가게에 가다보니 이 과자가 새로 나왔길래 하나 사왔어요. 드셔보세요.' 라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며 드린다면 얼마나 기뻐하시 겠니? 그렇게 작은 부분이라도 정겹게 대하며 위하는 것이 '효'의 시작인 거다." 그 말씀을 듣고 있자니 예전에 할머니와 같이 지내던 때가 생각났다. 아 이적에 나의 하루 용돈은 100원이었다. 그걸 들고 동네 수퍼에 가서 100원 짜리 과자를 사면 10원짜리 사탕을 하나 주었는데. 그걸 항상 할머니께 가 져다 드렸다. 치아가 거의 없으셨던 할머니는 그 사탕을 참 좋아하셨다. 어 쩌면 할머니는 어린 손자가 매일 가져다주는 그 사탕 한 알이 고마워서 그 렇게 맛있게 드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매일 그렇게 사탕 한 알을 할머니께 갖다 드렸고, 할머니는 항상 맛있게 드셨다. 할머니의 병환 이 위중해져서 시골로 내려가실 때까지 계속. 담임 선생님의 얘기를 듣다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갑자기 할머니가 너무도 뵙고 싶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시골로 내려가 뵙고 싶었지만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그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할머니 뵙는 것을 잠시 미루는 것은 당연한 듯 여겨졌다. 그때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 '잠시'후에 영원히 할머니를 뵐 기회가 없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게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접어둔 채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4월 초 순 어느 날. 막 학교에 도착한 나에게 선생님이 쪽지를 하나 건네 주셨다. 영문을 모른 채 펼쳐 본 그 쪽지에는 '할머니 돌아가심'이라는 글자가 선명 히 쓰여있었다. 할.머.니.돌.아.가.심? 나는 멀뚱멀뚱 눈만 깜빡거렸다. 글자 하나하나가 낱낱으로 분산될 뿐 의 미가 잡히지 않았다. '돌아가셨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나와 인득이는 곧장 시골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친지들은 우리를 보자 눈물을 글썽거리며,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내 우리를 찾으셨다는 말 을 전해 주었다. "불쌍한 놈들. 이제 누가 뒤를 보살펴 줄꼬?" 하시며 인득이와 나를 걱정하셨다고...... 할머니의 장례식은 봄빛 찬연한 4월, 맑은 햇살이 비추는 날 치러졌다. 흰 붕대로 똘똘 할머니의 시신이 담긴 나무관이 깊고 어두운 땅속으로 내려 졌다. 이상했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토록 좋아하던 할머니가 가시는 길에 눈 물이 나지 않았다.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에겐 할머니의 죽음이 얼떨떨할 뿐이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서울로 올라와 나는 다시 고3생활을 시작했다. 달 라진 건 아무 것도 없는 듯했다. 햇살은 무심하달 정도로 투명했고, 무적의 수능시험도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그건 곧 잘 너무나 사소한 부분에서 걸어나오곤 했다. 시장 거리를 지나가다 보게 된 나물 파 는 할머니. 좌판을 앞에 두고 쭈그려 앉은 할머니의 골 깊은 주름에 한 줌 엷은 햇살이 고이자 그 모습 위로 우리 할머니가 겹쳐졌다. 문득 발길을 멈췄다. 그제야 이젠 정말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졌 다. 할머니의 죽음이 온몸의 전율로 실감되었다. 그랬다. 가슴이 미어지도 록 그리웠다.....그,리,웠,다..... 내 배가 아플 때면 언제나 약손이 되어 주던 할머니의 손, 주름이 많이 진, 그러나 내게는 누구의 손보다 아름답던 할머니의 손, 내가 학교에서 상 장이라도 타오는 날이면 소녀 같은 웃음을 함빡 머금던 정겨운 얼굴.......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제는 이 모든 것들을, 나를 향한 사랑의 몸짓 하나하나를 볼 수 없다는 것, 그런 것이 죽음이었다. 지금도 나는 할머니가 보고 싶다. 내게는 마음속의 어머니이셨던 나의 할 머니, 다시금 어린애처럼 안기고 싶은 따스했던 할머니의 품속...... "할머니, 보고 싶어요!......보고 싶어요!" 고3, 유난히 덥던 여름을 보내며 고등학교3학년이 되어서는 아이들도 각오가 섰는지 다들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나또한 열심히 했다. 난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을 공부 에 열중하며 보내지 못했다. 채권채무 관계로 인하여 우리 식구가 생활하 던 곳을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시 간이 휴지조각처럼 버려졌던 것이다. 그 탓에 나는 절박했다. 고등학교 3학년으로 올라와서는 정말 절박한 심 정으로 공부했다. 초조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좋은 때이다.'하 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남은 약 8개월을 잘만 보낸다면 좋은 성적을 거둘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면에서 예전과는 다른 변화를 꾀했다. 하나는 잠을 줄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잠을 4시간으로 줄여서 공부를 했는데, 얼마 안 가서 그만두어야 했다. 잠 이 워낙 많던 터에 잠자는 시간을 그렇게 파격적으로 줄이니 깨어있는 시 간 동안 쏟아지는 졸음으로 인해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래서 수면 시간을 5시간으로 늘리고,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에 웬만하면 그대로 앉아 공부를 계속 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마라' 는 마음 속의 원칙을 세워 두고 실천 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열심히 보내니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실 력의 발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서 드디어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그 중요성에 대해 누누히 들어왔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방학을 맞았다. 이 시기의 활용이 수능의 성적을 좌우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다. 이 때는 정말 자는 시간과 밥먹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공부만 했다. 그렇게 열심히 공바를 하다보니 지겹기보다는 오히려 배미가 느껴졌다. 몰입이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한 가지에 몰입하였을 때의 기쁨은 생각 한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물리면 물리, 국사면 국사를 공부하면서 그 과목에 푹 빠지면 수능이라는 것은 2차의 목표가 되어버렸고, 마치 내가 학자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 그 과목을 깊게 탐구하는 것이 나의 주목표처 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공부는 그렇게 할 대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하면 다른 데서 찾을 수 없는 재미도 느껴진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나서 잠시 아픈 머리와 눈을 식히기 위해서 밖에 나가 바람을 쐴 때,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온통 초록빛 희망만이 놓인 듯한 그런 느낌으로 가슴은 충만했다. 여름 방학을 보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누가 뭐래도 더위와의 싸움이 었다. 지난 여름은 정말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었다. 지구온난화 현상의 여 파로 낮에는 약40도 가까이 올라가는 온도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 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게다가 우리집은 옥상인지라 여름의 그 더위는 이 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밤이 되어도 열대야 현상 때문에 온도는 좀처럼 낮 아지지 않았다. 새벽 4,5시나 되어야 조금 시원해질 뿐이었다. 그러다가 해 가 떠 오르면 또다시 찌는듯한 더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가장 더위가 심한 12시에서 5시에 잠을 자 기로 정하고, 생활의 리듬을 바꾸어 보려고 했다. 그러나 보기좋게 실패했 다. 왜냐하면 낮시간에 아무리 자도 새벽이 오면 또 졸려서 견딜 수가 없 었던 것이다. 생활의 리듬을 바꾸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더위를 견디며 공부를 해야 했다. 그 때 우리는 책상이 없었기 때문에 인득이와 같이 반지름이 약 30센치 정도인 밥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했다. 수능이 끝난 뒤에 형편이 닿아 아 버지께서 책상을 사주셨지만 고3 수험 생활 동안에는 내내 조그만 밥상에 서 함께 공부를 해야만 했다. 무더운 날씨에는 졸기 일쑤였던 우리는 졸다 가 서로 머리를 부딪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쑥스러움에 마주보며 빙 긋 웃어 보지만, 조금 있다가 다시 똑같은 일이 반복되곤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나의 각오가 단단히 서 있고, 마음이 강인한 때 에는 그 더위도 공부에 지장을 주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오히려 '난 땀으 로 샤워를 하면서도 공부를 한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자랑스럽기도 해서 공부에 더 열중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내가 나태해지면 더위 라는 것이 못 견디게 짜증나며 괴로운 것으로 변했다. 졸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고, 푹푹 찌는 후덥지근한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절,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내 마음을 잡아주는 큰 기둥이 있 었다. 바로 아버지였다. 그 여름, 우리집엔 세 명의 고3생이 있었다. 아버지 께서 여름 내내 우리와 같이 공부를 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전에 사둔 영어회화 테이프를 꺼내 그걸 전부 숙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시고는 정말 로 열심이셨다. 수험생인 나보다 오히려 아버지가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몰두해 있는 아버지의 모습 에서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느껴졌다. 내가 공부하기 싫어질 때난 나태해질 때면 가만히 영어회화공부를 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열심히 영어를 외우시다가 안경 너머로 눈을 맞추셨다. 그 눈빛 속에는 학자에게서 풍기는 그런 느낌이 있 었고, 나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힘을 주었는지 모른다. 50이 넘으신 아버지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옆에 계셨기에 무척이나 더웠던 그 여름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 한다. 그렇게 여름 방학을 온전히 공부로만 보내고, 드디어 2학기를 맞았다. 2학 기가 되니 반친구들의 양상은 두가지로 확연히 나뉘었다. 포기한 아이들은 아예 수업도 듣지 않고 자거나 딴 책을 보았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더 욱 더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는 듯 보였다. 우리반 칠판 옆에는 수능 시험의 남은 날짜를 표시해 주는 달력이 있었는 데, 그 달력의 숫자가 적어질수록 즉 수능 시험이 다가올수록 아이들도 긴 장이 되는지 수업 시간의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져 갔다. 반분위기가 조용 하다는 것과 무겁다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그 분위기만으 로도 고3이라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한 무거움에 짓눌린 채 다가오는 수 능 날짜를 하루하루 세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주신 새 이불과 수능 시험 시간은 속사포 같이 흘러서 어느새 수능 바로 전날이 되었다. 반 친구들 은 긴장된다면서 걱정스런 표정들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긴장이 되 지 않았다. 내일이 수능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이유는 지 금도 모르겠지만, 평소 모의고사를 보기 전날보다 오히려 더 편한 마음이 었다. 그렇게 별 긴장감도 없이 예비 소집 장소에 들렀다가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는 한두 시간 정도 공부를 한 뒤에 TV를 보며 편하게 있었다. 아버지 께서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언젠가 선생님이 수능 보기 바로 전날에는 일 찍 자는 것이 좋다고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그날은 12시 즈음하여 잘 생각 이었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 아버지께서 잠깐 어디 좀 나갔다가 오시겠다고 했다. 평소에 왠만하면 짐에서 나가지 않으셨기에 조금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 이 들었는데, 아버지는 30분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 그런데 맨손이 아니었 다. 커다란 짐을 하나 메고 오신 것이다. 그 짐 속에는 새 이불 두 채가 들 어 있었다. "인식아, 인득아! 너희들이 말은 안 해도 아마 긴장되고 마음도 편치 않 을 거야. 그래서 잠도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 이불을 사왔 다. 몇 년째 헌 이불을 덮고 잠을 잤지만 오늘만은 이 새 이불을 덮고 편 히 자거라. 내일 결과에는 그리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은 최선만 다하면 되는 거야. 설사 수능을 잘 못본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을 탓하지는 않을 테 니까." "이불도 꽤 비쌀텐데." "하하,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내일 수능 시험 보는 아이들인데, 마지막 밤 이라도 편하게 재우려고 한다니까 싸게 주더구나." "아버지, 저희들은 그냥 아무거나 덮어도 잘 자는데, 차라리 아버지 이불 이나 사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아버지 걱정은 말아라. 난 아무 이불이나 덮어도 된단다." 난 가만히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이 필요치 않았다. 그날 인득이와 나는 아버지가 사주신 이불을 덮고 맘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따 뜻한, 참으로 포근한 밤이었다. 아버지가 사주신 새 이불의 감촉 덕분인지 몸도 마음도 가뿐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밥새 한잠도 못 주무셨는지 얼굴에 피곤기가 역력했다. 수능 시 험장으로 갈 차비를 마치고 집에 나서는데, 아버지도 같이 가시겠다고 하 셨다. 몸이 불편하신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험장에 다다르니 각 학교의 후배들이 나와서 꿀차와 귤을 나누어 주면 서 선배들을 격려해 주고 있었다. 그들을 보니 그제서야 내가 시험장에 왔 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 이제 들어가세요." "그래, 먼저 시험장으로 들어 가거라. 난 여기 조금 있다가 갈테니까." 난 시험장으로 들어가려다 문득 손목 시계를 안 차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 다. "아차, 아버지. 손목 시계를 안 차고 왔어요.' '자, 내 시계를 차고 가렴." 아버지께서는 손목시계를 끌러 주셨다. 아버지가 매던 칸에 진한 자국이 나 있었다. 거기에 맞취 줄을 매니 손목이 꽉 죄었다. 한 칸을 늘리니 그 제서야 손목에 맞았다. '손목이 이렇게 얇아지시다니......' 내 눈에 들어온 아버지는 피곤에 지친 초췌한 모습이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이제 들어가서 맘 편히 먹고 시험 쳐, 알겠지?' "알았어요." 난 시험장으로 들어가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가 자리에 서서 계속 인득이와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수능이 나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 계기가 될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 다. 만약 수능을 잘 본다면 장학생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테고, 잘 못 본다 하더라도 이젠 직장을 구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이다. 이렇게 되든 저렇게 되든 수능 고사를 계기로 극도의 경제난에 허덕 이는 우리 가족에게는 조금이나마 희망이 생길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 면에서 수능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 탓인지 결과에 그리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여태껏 갈고 닦았던 나의 실력을 유 감없이 발휘해야만 하겠지만 난 그저 최선을 다하면 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내 맘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수능 시험에 임하였지만 시험의 시작에서부터 끝날 때까지 나의 최선을 다했다. 시험 도중 마음이 떨리고 긴장될 때는 아버지께서 끌러 주신 시계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온통 초침소리로만 움직이는 것 같던 시간이 자나 그렇 게 시험은 끝났다. 시험장을 나오며 이번 수능 시험 문제가 너무 쉬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별력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아이들의 의견도 그러했다. 어떤 아이들은 '이거 때문에 내가 그 고생을 했느냐'며 억울하다 고도 했고, 그런 식으로 수능이 끝나니 허무하다고도 했다. 집에 와서 인득이와 함께 EBS를 보며 수능의 답을 맞추었다. 한 문제 한 문제 맞출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언어 영역을 다 맞췄을 때 다소나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잘 맞 은 118.4점이 나왔기 때문이다. 언어 영역을 풀면서 문제가 너무 쉬워서 잘 나올 거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잘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 음으로 수리 탐구 영역을 맞췄다. 솔직히 수리탐구 영역은 내가 어느 정도 자신했던 영역이었고, 문제도 쉽게 나와서 다 맞을 거라는 기대를 했었는 데, 3점짜리 주관식 문제를 틀려서 만점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점수면 만족할 만한 점수였다. 그리고 수리탐구2는 많이 틀려서 107.5점을 받았고, 외국어 영역은 듣기에서 2문제, 독해에서 1문제를 틀려서 76점이 나왔다. 일부러 천천히 점수를 합산 해 보았다. 378.9점. 앗,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 정도면 내가 원하는 대학의 어떤 과라도 다 갈 수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번 수능이 아무리 쉬웠다해도, 전년도 수석보다도 높은 점수 를 맞았으니 이건 상당히 잘 맞은 점수란 생각이 들었다. 난 기쁜 내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곧이어 방영된 9시뉴스에서는 이번 수능 성적이 전년도에 비해 평균 20점정도가 올랐다는 분석이 나왔다. 서둘러 내 점수를 전년도 점수 로 환산해보니 358.9점이었는데, 이 정도만도 대단한 점수라는 생각이 들었 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전년도에 대비해서 오른 점수의 폭이 20점이 아니라 50점이라 했다. 그러니 내 점수도 생각처럼 그렇게 뛰어난 점수는 아니었다. 여하튼 그때의 난 그런 사실을 몰랐었고, 내가 그저 대단한 점수 를 맞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조금 있으니 우연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 우연이야." "응, 인식아. 잘본 것 같애?" "그래. 잘 나왔어. 378.9점 맞았어. 잘 나왔지?" "와. 정말 축하해. 정말 잘 나왔구나." 그렇게 우연이의 축하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날 학교에 등교하였다. 반 친구들은 벌써 내 점수를 알고 있었다. 이미 전농동과 답십리 일대에 내 점수가 다 알려졌다는 과장 섞인, 그러나 기쁜 축하를 받았다. 선생님께 서도 내 점수를 듣고는 잘 나왔다며 칭찬하셨다. 기분이 좋았다. 고교 시절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최고 지표는 아마도 수능일 것이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하는 말이 있듯이, 수능 성적이라는, 어찌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으로 인하여 나의 힘겨웠던 시간들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고, 좋은 결과를 위한 하나의 시련의 과정으로서 자리매김 될 수 있다는 게 무 엇보다 기뻤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에는 최상의 성적을 지녔다가 졸업할 때 성적은 최 하의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 경우와 입학할 때는 최하의 성적이었지만 졸업 할 때는 우수한 성적을 갖게 된 경우를 비교해 볼 때가 있다. 보통의 사람 들은 십중팔구 전자의 학생에 대하여는 불성실하다고 평가할 것이고, 반면 에 후자의 학생에 대해서는 성실한 학생이라느니, 근성을 가진 학생이라느 니 등등의 온갖 수식어를 붙이며 극찬할 것이다. 그들의 사정이 어떠했는 지는 이미 고려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극단적인 예같지만 세상의 거의 대 부분의 일들은 결과로 평가된다. 어찌 보면 비인간적이라 할 수도 있으나 한 사람을 평가할 때 객관적인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달리 없기에 그 런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좀 다르게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일들이 결과로 평가된다 는 걸 안다. 하지만 뭐라 해도 과정이 없이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다. 결과로 인하여 지내온 과정들이 가치 있게 평가되기 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데, 이건 역으로 생각하면 작고 보잘 것 없을 지라도 그 과정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말 도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좋은 결과로 인하여 나의 지난날의 고통들이 한 낱 고통으로 끝나지 않게 된 것이 기쁘다. 하지만 이 모든 결과는 그에 상 응하는 과정들, 비록 지지부진한 일들이 많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고자 했던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Sogang Univercity(서강 대학교)와 나 나와 서강 대학교가 첫인연을 맺게 된 것은 SBS TV의 '행복찾기' 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후 며칠 뒤였다. 내가 다니던 대광 고등학교에 서강 대 학교 총장님과 입학처장님이 찾아오셨다. 인득이와 나는 교장실로 호출되 었다. 나로서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고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고등학교 의 교장 선생님만 해도 잘 만나 뵙지 못하는 어려운 존재로만 여겨지는데, 한 대학이 총장님께서 방문하신다는 것은, 그것도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인득이와 나는 일단 교무실로 갔다. 조금은 겁이 났다. 우릴 보고 무어라 하실까? 왜 오셨을까? 그땐는 수능 시험 준비도 막바지에 달한 10월이라 뉴스와 신문 등을 거의 보지 못했던 나의 사회의 동향을 잘 몰랐고, 그래서 서강 대학교 총장은 TV에서 봤던 박홍 씨라고만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어떤 인물인지 잘 모 르지만 TV에서 비춰진 총장님의 모습은 근엄하고, 권위적이며, 엄하게만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은 다가와 총장님과 대면할 시간이 되었다. 교장실 문을 열었다. 우리는 총장님과 입학처장님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상상했던 근엄한 모습의 박홍 총장은 없고, 인상 좋아 보이는 한 분 이 캐주얼 복장을 하고 인자하게 웃고 계셨다. 난 설마 그분이 총장님이리 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한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총장님이 캐주얼 복장 으로 나오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이분이 이상일 총장님이시고, 난 입학처장인 임상우예요." '뭐? 이분이 총장님이라구?' 의아한 마음에 그분의 모자티 가슴에 씌인 영문을 보았다. Sogang이라고 써 있었다. 내 눈에 그것은 '소강'으로 읽혔다. '소강?' 자꾸 이상한 생각만 떠올랐다. '서강으로 하려면 Seogang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혹시 지방에 소 강 대학교가 있나?' 아는 것이 없으니 자꾸 헛생각만 떠올랐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서강 대학교의 총장은 박홍 씨였고, 서강 대학교의 영문 표기가 어떤지 몰랐으니 그런 의심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결코 웃어 넘길 일만은 아니었다. '그렇지. 서강 대학교 같은 유수의 대학에서 나같은 이를 보러, 그것도 총 장님께서 직접 오시겠어?' 나는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총장님께서는 방송을 통해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 찾아오셨다고 했다. 당 신의 대학으로 오면 4년간의 학비는 물론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의 학비 도 대주겠다고 하셨다. 또 원한다면 유학까지도 보내주신다고, 그리고 설사 당신의 대학으로 안 오게 된다하더라도 연락은 해달라고 했다. 우리를 개 인적으로 돕고 싶다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다음에 말씀을 끝내고 가시면서, 총장님이 쓰신 책 과 대학의 문장이 새겨진 시계 등 선물꾸러미를 주셨다. 그리고 아버지께 전해드리라며 100만원을 주고 가셨다. 그 분들이 가신 후에 난 선물꾸러미에 새겨진 방패 모양의 대학교 문장을 보고 그제서야 진짜로 '소강 대학교'가 아닌 '서강 대학교'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로 서강 대학교에서 나에게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것 이었다. 그때는 수능도 보지 않은 시점이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수능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 주신 총장님과 입학 처장님이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서강 대학교로 진학하 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수능 시험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는 입학처장님이 집으로 찾아 오셨다. 특 차 원서 두 장을 가지고서, 그때 사실 인득이와 나는 서강 대학교에 갈 것 인가. 아니면 더 상위권 대학교를 갈 것인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고 민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결국 서강대로 특차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가 바로 총장님과 입학처장님이 우리 가족에게 보여준 따뜻한 관심이었다. 둘째로는 수업료 문제였다. 우리집은 사실 대학 학비를 댈 만한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비 전 액을 보장해주겠다고 한 서강 대학교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왜 서울대에 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내 스스로도 그때의 결정이 옳았던가, 그렇지 않았던가를 묻곤 한다. 그러나 난 지금의 나의 상 황에 대하여 만족하고 있다. 공부란 것은 어느 학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름에 연연하기보다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 보다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인정해 주는 곳에서 공부하는 것. 그것 또한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므로 난 내 결정에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날 믿어주고, 인정해준 서강 대학교에 감사한다. 나의 꿈, 나의 행복론 이제 19살인 내가 나의 꿈이나 행복론을 논한다는 것은 어쩐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19년의 삶을 살면서 나름대로 느낀 것들을 진솔히 풀어내는 일은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어느 정도 되돌아 보고 정리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겐 꿈이 있다. 남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는 것. 그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불쌍한 사람들에게 하나의 희망의 씨앗이 된다면, 그래서 내가 그들 의 희망에 불을 지피 수 있다면 , 삶에서 그것보다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나의 행복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 힘든 과정이 나에게는 고통이 아닌 행 복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힘든 과정 하나하나가 나의 꿈을 향 한 징검다리가 될 것이기에. 꿈과 미래가 있다는 것, 지금과는 다른 또 하 나의 내 모습을 그리며 그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젊음은 이래서 아름 다운 것이 아니던가!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의 왕비였던 마리 앙뜨와네뜨는 시민들이 "빵이 아 니면 죽음을 달라!"고 했을 때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왜 저리 소란인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기가막힌 왕비의 반응에 대한 유명한 일 화이지만, 난 왕비의 그런 태도를 일면 이해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호위호 식하며 자랐을 마리 앙뜨와네뜨의 경우, 음식이 없어서 굶은 적은 결코 없 었을 것이다. 그런 왕비가 자신의 환경을 기준으로 시민들을 판단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자라온 환경은 그의 생각의 폭이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방송에 나오고 어려운 사정이 알려지자 우리 가족 을 돕고 싶다며 연락을 주신 분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도우러 온 사람들은 거의가 다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리어커를 끌고 다 니며 계란을 파시는 아주머니는 우리가 불쌍하다며 10만원을 가지고 오셨 는데, 그 돈은 객관적으로야 큰 돈은 아니지만 그분에게 있어서는 1억 원 과도 맞먹는 가치를 지녔을 것이다. 또 어려서부터 불우하게 자라오신 한 아주머니께서는 우리 얘기가 남의 얘기 같지 않다며 반찬을 만들어다 주셨 다. 일반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데는 대부호들이 선뜻 큰돈을 내놓을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은 거의가 우리 와 갖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은 어려운 분들이었다. 내가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그들의 희망이 되는 것을 꿈으로 삼은 이유 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몸으로 직접 어려운 상황을 겪어 봤기에 그 고통 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고, 절실히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 게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겠다는 꿈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 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불쌍한 이들은 바로 꿈을 잃어버린 이들이 다. '내일'이라는 말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오늘'은 언제나 지친 그림자로 누울테니까 말이다. 언젠가 TV에서 홈리스(homeless)족과 IMF 경제난 때문에 버려져 고아원 에 가야 하는 아이들을 주제로 다룬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다. 홈리스 족이란 집이 아니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떠돌며 살게 된 이들을 말한다. 그 들 중에는 버젓이 집이 있고, 가족도 있지만, 가장으로서 실직자가 되었다 는 사실에 대하여 면목이 서지 않아 집에 안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고, 아 예 집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낮에 지하철에서 잠을 자거나 구걸을 했고, 밤에는 그나마 지하철에서 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아서 제대 로 잠도 못 자고 쫓겨 다니는 처지였다. 그런 이들이 끼니마다 제대로 밥 을 찾아 먹을 리는 만무였다. 그 프로그램을 취재하던 한 기자가 어떤 이에게 국수 한 그릇을 사주는 장면이 나왔다. 그 사람은 미친 듯이 국수를 먹으면서 거의 1주일간을 굶 으며 지냈다고 말했다. 너무 굶어서인지 젓가락질을 하는 손은 떨리고 있 었고, 그 반대편 손도 다쳐서인지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정말로 밥 한 끼와 따뜻한 잠자리가 그리운 이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먹고 자는 일이라기보다 의욕상실에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힘든 삶에 지쳐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는 그대로 안주하는 이들, 미래라는 단어가 그들에게는 이미 너무도 생소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 먹고 못 입어서라기보다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는 점에서 그들이 불쌍했다. 그리고 IMF한파 때문에 소득이 줄어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기는 사람들이 증가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아이들은 그 보육원에서 마냥 줄겁게 놀고 있 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 프로그램 마지막 부분에서 한 아이가 "아버지, 보고 싶으니까 빨리 오세 요." 라며 우는 장면이 나왔다. 그 어린 아이가 지금 느끼는 슬픔이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변해, 평생 한 을 품고 살아간다 해도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그 어린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길래, 무엇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너무나 슬픈 일이었다. 그들이 불쌍했다. 가슴이 막혀오는 답답함을 느꼈 다. 이 모든 일들이 돈의 부족이라는 이유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리고 우리 각자의 무관심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도 말이다. 나태 한 지금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을 해야만 하지 않는가? 지금의 나는 돈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 특이할 만한 특기도 없는 그 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베풀려 해도 베풀 것이 없는 내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값싼 동정으로써가 아니라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이라 생각한다. 지식과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언젠가 그것이 충 분히 축적되는 날이 오면, 그것들을 이용해서 어려운 이들 편에서 서서 살 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큰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가 해야만 할 일들이 너무 많다고 으꼈다. 나의 앞날에 어떠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모른다. 내가 고 교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보내게 될지를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듯이. 그러 나 그 과정들을 통과했기에 한편으로는 자신감이 있다. 분명 쉽지 않았던 고통의 시간들을 나는 내 나름대로 이기며 뚫고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어 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나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는 자세로 살고자 노력한 다면 보이는 모습이 어떻든 그건 이미 환경에 굴복당하는 삶이 아닌 것이 다. 이제 내 앞에는 나의 꿈이 있다. 그 궁극적인 꿈을 이루기 위해 우선은 남의 희망이 될 만한 이가 되도록 나를 갈고 닦는 일, 다시 부단히 노력하 며 사는 일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계속 걸어가야 할 이 길에 가 슴을 펴고 발을 내딛는다. 제 2 편 동생 인득이의 이야기 제1장 평탄하지 않던 나의 고교 시절 방황1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집엔 큰 변화가 일었다. 믿었던 아버지 친구분 의 배신으로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났던 것이다. 집안엔 온통 붉은 딱지가 붙 기 시작 하였다. 장롱에, 냉장고에, 책상에...... 시간이 지날수록 채권자들의 횡포 도 심해져 갔다. 집이며, 짐에 남아 있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은 이미 모두 경매 로 넘어갔는데도, 그들은 계속 찾아와 횡포를 부렸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폭력배를 동원했다. 그들은 우리의 보금자리를 구둣발로 마구 짓밟았으며, 우리 식구들을 윽박질러댔다. 그런 폭력배들은 상대방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한없이 괴롭히려는 기질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들과 맞 섰다. 형과 나 역시 아버지를 도와 그들과 맞섰으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 다. 나의 힘은 너무도 약했던 것이다. 그때처럼 나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폭력재들이 올까봐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채권자들의 사정 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이 미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어두운 집안에는 붉은 딱지가 붙은 채 정돈되지 않은 가구며, TV 등이 어지럽 게 얼려 있었고, 그나마 그것들이 하나하나 없어질 때는 나의 마음 한 구석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당시 그렇게 가정 환경이 엉망이었음에도 아버지께서는 한번도 우리들에게 힘든 내색을 비추거나 실수를 하지 않으셨다. 보통 그런 상황에 몰리게 되면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술로 모든 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 일반 적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당시 상황을 정 확히 설명해 주셨고, 덕분에 우리들 역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이런 상황일수록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 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속이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집에 와서는 아버지 가 계실 때만 공부하는 척하였고, 안 계실 때에는 계속 잠을 자거나 마냥 거리 를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학교 생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 얼굴에서 밝은 표 정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쉬는 시간에는 책상 위에 엎드려 내리 잠을 잤고, 그것이 수업시간에까지 연장되는 일이 많았다. 수학 분반에서도 B반이 되 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수학은 다른 과목과 다르게 평가 시험을 봐서 그 성적 에 따라 이등분을 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은 A반, 성적이 부진한 학생은 B반으 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나는 전체의 1/2에도 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차 수학에도 흥미를 잃게 되었다.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 지만, 갈수록 수학은 넘기 어려운 산맥이었다.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조차도 하지 않아서 숙제 건사를 받는 날이면 으레 교실 뒤에 벌을 받아야 했다. 내 방황은 일정한 테두리를 빙빙 겉도는 것으로 지속되었다. 무엇이, 왜, 어 떻게,...... 아무것도 설명되는 것이 없었고, 어떤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그 대로 길을 잃은 방황이 시작된 것이다. 끝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 모든 걸 담담히 받아 안기엔 나는 여린 감성을 갖은 열여섯 소년에 불과했 던 것이다. 시간의 속성은 잔인했다. 내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내 방황의 늪이 얼마 나 깊었는지 상관없이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갔고, 어느새 중간고사 철이 되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도 꺼야 했기에 나는 벼락치기로 공부를 해 간신히 중간 고사를 치렀다. 성적은 전교 석차 20위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평소에 아 무리 못해도 5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거의 없었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러나 나의 노력에 비하면 사실 그건 과분한 성적이었다. 그렇게 교과 성적까지 떨어지자 나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모든 일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했다. 자연히 나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다. 난 그 성적을 아버지께 숨긴 채 생활하였다. 그걸 보여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 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평소 당신 아들들 성적 에 관심이 많으시던 아버지도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으셨기 때문에 나의 성적 에까지 미처 신경을 쓰시지는 못하였다. 그러기를 일주일 가량이 지났을까. 형 과 같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오는 도중에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 다. 그때 문득 아버지께서 성적에 대해 물어오셨다. 그 순간에는 차마 아버지를 속일 수가 없었다. 난 주저주저하며 내 성적표를 아버지께 보여 드렸다. 가만히 들여다 보시던 아버지는 배고플테니 집에 가서 밥차려 먹으라고만 하실 뿐, 어 떤 짜증도 나무람도 없으셨다. 언제나 우리의 교육에 대해서는 열정이 대단하셨 기에 나는 당연히 호된 꾸중을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휘청거리며 뒤돌아 서셨다. 그리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셨다. 나 는 멀어져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그 뒷모습 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버지께 실컷 나무람을 들었더라면, 뺨 이라도 몇 대 맞았더라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이미 내가 당신을 속이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는 단지 그 짐작이 사실로 드러나 는 순간일 뿐이었던 것이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의 싹을 밟아버리고 있다는 것. 따뜻 하게 반겨주는 아내도 없이 우리 형제를 눈물로 키워오신 아버지의 가슴에 못 을 박아 버리고 만 것을. 눈꺼풀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왜 공부를 게을리 했던가를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였을까? 아버지께서 뒷머리가 아프다고 하신 것이 말이다. 아버지는 후에 그것이 악화되어 좌반신 마비로 고생하게 되었고, 지금 도 상당히 고생하고 계시다. 결국 나는 아버지께 변을 가져다 준 일등 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모진 비바람 후에 다시 일어서는 잡초처럼 나는 잡초를 상당히 좋아한다. 잡초는 어디서나 자란다. 가파른 벼랑에서도, 보도 블록 틈새에서도, 먼지 쌓인 창틈에서도, 지독한 냄새가 나는 쓰레기 더미 에서도...... 그들의 생명력은 무척이나 강인하다. 모두에게 잡초는 귀찮은 존재 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런 잡초에게 모두들 눈길 조차 주지 않을 때에 꽃이라도 피우게 되면 그것만큼 눈부시고 아름다운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내가 어려운 과정을 헤쳐나가리란 굳은 결심을 했는지 어 떠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일이 있은 후에 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아버지를 속인다는 것이 싫 었기에 되도록 그런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건 나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학교에서 습관처럼 졸음이 몰려오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고, 그때마다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선생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점차 나는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나름대로 모든 학교 생활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일도 하게 되었다. 아버지께 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 죄송스럽던 차에 담임 선생님의 권유가 있어도 형과 같이 근로장학생으 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고등학교 도서관치고는 상당히 커서 보유 도서가 몇 만권이나 되었다. 그 도서관 일 끝내고서 바닥청소까지 마친 후 교문을 나서는 시각은 보통 9시까지 마친 후 교문을 나서는 시각은 보 통 9시 30분 정도였다. 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10시 내외가 되었다. 집에 와서는 밥을 먹은 후 곧바 로 그날 배운 것들을 복습하였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12시가 넘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서는 집앞으로 나와 도로와 가로수 그리고 불켜진 가로등을 캔버스 에 옮겨 그리는 작업을 하였다. 미술부 선생님께서 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 시며, 집에 가서 그림을 몇 장 그려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졸리고 피곤 하였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특히 비가 주룩주룩 내 리는 날 밤의 가로등 켜진 도로와 가로수들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젖은 도로는 가로등 불빛에 아련한 황금빛으로 빛났다. 비가 땅에 닿는 소리와 차가 빗물 속을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그 가로수들과 도로를 그리는 것은 어디서도 맛보기 힘든 황홀항 경험이었다. 그림을 그린 후에는 가로수를 상대로 태권도 연습을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 로 치고, 차고, 때렸다. 주먹에 피가 맺힐 때까지 나무를 쳐댔다. 잘 올라가지 않는 다리로 차기 동작을 반복하며 연습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연습은 아니 었던 것 같다. 채권자들의 회포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던 나의 신체적 나약 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밤마다 가로수와 씨름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가 되었다. 지 칠 대로 지쳐있었기에 때문에 눕자 마자 잠이 들었다. 몸은 피곤하였지만 나 스스로 느끼는 보람이 컸고, 무엇보다도 어떤 것에 열중한다는 것이 많은 즐거 움을 주었다. 생각해보다면 그때만큼 공부와 운동에 열심이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성적이 올랐고, 수학도 B반에서 A반으로 옮 기게 되었다. 결국 학기말 종합 성적 평가에서 형이 전교 1등, 내가 전교 2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학기 초 방황하는 마음의 갈피를 못 잡아 잠시 이탈했던 형과 나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 놓여 좌충우돌하며 방황을 하고 나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상 황에 처하게 되든 지간에 그 상황의 어두운 면만을 볼 것이 아니라, 밝은 면을 보고 그곳에 우리의 희망을 거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본다. 여기 연습장 종이 한 장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종이의 앞면은 흰색이고, 뒷면은 검 은색이다. 그 종이를 앞에서 본 이들은 종이가 깨끗하다고 좋아할 것이고, 뒤에 서 본 이들은 종이가 검다고 불평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도 한때는 우리 가정 상황의 어두운 면만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뒷면에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아버 지의 사랑과 내가 건강하다는 희망도 있었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열 번을 쓰러지더라도 비바람 후에 다시 일어서는 잡초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굴의 용기와 의지를 갖추는 일이다. 성공과 실패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없는 것이다. 방황 2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는 내게 행운이 따르는 것 같았다. 마음의 중심을 잃고 헤매는 일이 없어졌고, 성적도 안정 된 데다가 내가 존경하던 분 을 담임 선생님으로 맞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수학을 가르치시던 유영민 선생님이셨다. 담임 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미진했던 나의 수학 실력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우리 학교는 미션 스쿨이어서 그런지 선생님 들이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다. 우리 집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아신 선생 님들께서는 보충 수업비 같은 것들을 대신 내주곤 하셨다. 그분들의 진심 어 린 도움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대학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으 로 생각한다. 그 따뜻한 마음길을 걸은 덕에 다른 어려움들이 나를 뒤흔들지는 못했고, 나의 생활을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생활에서 이런 작은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 대가로 신은 내게서 너무도 소중한 것을 앗아가 버렸다. 고3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봄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날아 온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내게 단지 할머니를 잃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건 나의 어린 시절을 빼앗긴 것이고, 나의 어머니를 잃은 것이며, 내 꿈의 한 축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어린 시절,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니 그것은 소중하다고 하는 추억의 차원을 넘어선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건 언제나 포근하고 아늑한 엄마 품이고, 친근함 을 주는 고향이자, 우리들의 정신적 안식처인 것이다. 바로 거기, 나의 아름다운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계셨다. 나와 형은 어렸을 때 몇 년간을 할머니와 함께 보냈다.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자라왔던 우리에게 할머니는 곧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때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면 학부모님들이 자신의 아들, 딸이 달리 는 모습을 보기 위해 과자며 과일 등을 잔뜩 싸들고 모여들어 학교는 온통 북 새통이었다. 제각기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고 나면 어느새 학교는 발디딜 틈 이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달리기 시합이나 줄다리기를 한 다음에 각자 부모 님을 찾아갔다. 시합에서 잘했던 아이든, 못했던 아이든간에 엄마 옆에 앉아 모 두들 신나게 먹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무심코 그런 걸 보고 있다 보면 문득 '아, 저 애들은 엄마가 있구나' 라는 생 각이 들었다. 하지만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 비록 나에게는 나를 찾아와 줄 어머니는 안 계셨지만 틀림없이 할머니가 와 계실 것이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 렇게 든든한 나의 지주였던 것이다. 나는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내 차례가 되면 흙먼지가 뿌옇게 이는 저편 결승선 을 보며 잔뜩 긴장을 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께서 보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총소리가 울리면 앞만 바라보며 정신없이; 달렸다. 나는 최선을 다 해 달렸지만 1등을 한 기억은 없다. 잘하면 2등 혹은 3등이었다. 팔목에 등수가 찍힌 도장을 받고 나면 할머니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스탠드에 가봐도, 운동장 의 학부모 석에 가봐도 할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한참을 찾아 헤매다가 혹시 할머니께서 안 오셨나하는 불안을 느낄 때 쯤, 운동장 맨 구석 자리에 조그마 한 돗자리를 펴놓고 앉아 당신의 손자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할머니를 발견하곤 하였다. 할머니는 몇 개 안 남은 이를 드러내 보이신 채 환하게 웃으시면서 나 를 반겨주셨다. 남들의 눈에는 흉하게 느껴질지 모를 할머니의 그 웃음이 나에 게만큼은 그 누구의 웃음보다도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할머니께서 싸오신 도시락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다 른 돗자리에는 통닭, 과자, 동그랑땡, 과일 등이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넘쳐났지 만, 우리 돗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삶은 달걀과 과일 몇 조각뿐이었다. 그러나 분명 할머니께서 아침부터 준비하셨을 그것들은 다른 어떤 음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무 그늘 아래서 할머니와 함께 먹고, 얘기하며, 웃을 수 있는 게 더없이 행복하기만 했었다. 운동회가 끝나면 나와 형 그리고 할머니는 먹고 남 은 것들을 싸들고 같이 집으로 오곤 했다. 이젠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고마운 할머니......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담배를 가까이 하셨다. 그것도 값이 가장 싸고 독한 청 자나 백자 같은 것만 피우셨다. 그 담배 냄새와 흔히 말하는 노인 냄새가 섞인 것이 할머니의 냄새였다. 그 냄새는 결코 향기로운 냄새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냄새를 어떤 냄새보다도 좋아했다. 언제나 그 냄새를 맡으며 할 머니 품에서 잠을 자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의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들으며 잠들면 할머니께서는 내 등을 토닥거려 주시곤 했다. 그때만큼 편안히 잠을 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아늑하고 편안하게 잠들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할머니는 안 계시므로...... 그렇다.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92세가 되시 는 할머니는 1997년 4월 27일. 우리를 떠나셨다. 그 전보를 받은 날, 우리는 급히 시골로 내려갔다. 상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 고, 많은 친척 분들과 동네분들이 큰댁에 모여 있었다. 할머니의 시신은 병풍 뒤에 안치되어 있었다. 친척 분들께서는 조금만 더 일찍 오지 그랬냐며 오열을 터트리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할머니께서 형과 나를 무척이나 찾으셨다고 하시 며......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큰 고통 없이 가셨다고 한다. 평생을 착하게 살다 가신 분이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 큰 고통 없이 가실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 었다. 그러나 누구도 알지못하는 멀고 외로운 길을 떠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순 간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마지막 순간만 이라도 옆에서 그 힘없는 손을 잡아드렸더라면 더 편안한 마음으로 가실 수 있 었을 텐데...... 가슴이 천 근이나 달아 놓은 듯 무겁고 저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할머니 곁에서 눈물을 흘려 주시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가끔씩 눈물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눈물을 흘리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어린 아이가 된다. 살인자도, 강간범도, 사기꾼도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순간만큼은 모두 아름답다. 왜냐하면 그 순간 에는 오직 순순한 감정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 죽어서나마 그렇게 아름다운 눈물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 했다는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덮어 주었다. 그날 밤, 혼자 이리저리 마당을 거닐었다. 밤하늘엔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별들이 유난히도 많이 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별들을 보고 있자니 나의 눈물 때문인지 하나둘 흐릿해져 갔다. 그렇게 흐릿해지는 별빛을 따라 나의 꿈 역시 스러져갔다. 언젠가는 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던 나의 꿈...... 어릴 때 학교에서 상을 받아오면 "어이구 내새끼" 하시며 대견해 하시던 할머니. 수학능력 시험이 끝나 면 곧장 시골에 내려가 성적표를 보이며 자랑도 하고, 칭찬도 듣겠다던 나의 소 망도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꿈이 설 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은 정말로 견디기 힘 든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할머니의 장례식이 있었다. 흰 천으로 감겨 있는 할머니의 시 신은 마치 어린 아이의 몸처럼 작았다. 어린 시절 나의 눈에 비쳤던 할머니는 항상 나보다 컸는데...... 그렇게 작은 몸으로 한평생을 살다가신 할머니의 시신 이 너무도 애처로와 견딜 수가 없었다. 할머니보다 훨씬 커져버린 나는 당신의 임종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너무도 괴로웠다. 불가능하지만 영원히 할머니보다 작은 꼬마로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 는 할머니는 그저 나무토막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그토록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것일까? 땅속으로, 땅속으로 내려가는 통나무 같은 할머니, 이제는 하나 의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그 육신이 너무나 한스러워 보였다. 뻣뻣한 나무토막 같은 그것이 우리 할머니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할머니의 죽음 자체가 믿기 지 않았는데도 장례식은 그렇게 끈 이 났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생활은 예전과 같아졌다. 할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변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 았고, 도로마다 넘쳐나는 자동차들도 예전과 다름없이 그대로였다. 죽은 자를 외면하고 산 자는 산산 자의 길을 가는 것이 운명이라도 되는 듯이 나 역시 다 시 고3의 빡빡한 생활로 돌아와 버렸다. 그렇게 공부와 일상 생활에 허덕이는 동안 할머니의 모습은 점차 내 가슴 속에서 흐려져갔다. 아니 흐려졌다기보다 는 어느 틈에 할머니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렇게 생활에 파묻혀 지내던 어느 날, 평소처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게 된 낯익은 광경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어느 할 머니 한 분이 울며 보채는 손자를 등에 업고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때 난 보았다. 오래 전 할머니 치마를 붙잡고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르던 한 꼬 마와 그 꼬마를 달래던 주름살 깊이 패인 어는 할머니를 말이다. 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꼬마는 할머니와 헤어지던 날, 이제 누구의 간섭 없이 맘껏 놀 수 있겠다 는 생각 때문에 내신 기뻤다. 동서울 터미널행 택시를 타시려다 돌아와 자기를 껴안고 우시는 할머니를 꼬마는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품이 마냥 답답해 할머니께 또 만나자는 인사를 하고는 그렇게 돌아서 버렸다. 그리고는 동네 골 목으로 뛰어가 친구들과 맘껏 놀았다. 그 꼬마는 어느덧 소년이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커 져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미 만날 수 없는 먼 곳에 계셨기에 소년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슬픔은 밤마다 소년을 괴롭혔다. 헤어지 던 날, 할머니를 그냥 그렇게 보내드린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것이 마 지막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할머니를 그냥 그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을....... 세 상에는 응당 죽어야 할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이나 데려갈 것이지 왜 우리 불 쌍한 할머니를 데려갔느냐고 하늘에 대고 증오 섞인 원망을 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오는 법, 이제는 영영 회한으로 남을 나의 할머 니......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역어 들릴 걸 - 서정주의 '귀촉도' 중에서 그후 나의 일상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지만. 내 안에선 이미 낳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대단해 보이던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 었고, 반대로 그냥 지나쳐 갔던 것들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 인간들이 행 하는 모든 행위들이 쓸데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내 마음의 큰 축이 사 라져 그 자리를 무엇으로 메꿔야 할지 몰랐다. 이전의 방향과는 달랐지만 바 람이 그대로 통과해버리는 허전한 가슴은 방향을 잃고 있었다. 고통은 언제나 한꺼번에 떼로 몰려오는 것을 속성으로 갖는다. 할머니의 일로 마음이 한없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우리는 채권자들의 눈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했 다. 몇 번의 도피 덕에 채권자들을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긴박한 도피의 와중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었다. 어린 날들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며, 내가 그렸던 그림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하던 자잘한 사물들, 심지어는 우리들이 쓰던 교과서까지도 몽땅 잃어 버려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 우리 마음의 여유와 기쁨을 잃어야 했다. 거기에 아버지의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뇌졸중 증세가 점점 심해지다가 드디어 좌반신 마비 증세까지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혼자서는 옷입는 것조차 힘드신 정도였다. 하룻밤에도 몇 번씩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 하기도 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갈수록 병세가 심해지기만 하는 아버지께 어떤 위로 한 줄 드리지 못 하였다. 당연히 집안 경제 사정마저 극도로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금반지며 시계, 책 등을 팔아 근근히 생활을 이어갔는데, 그나마 완전히 바닥이 나버려 더 이상 팔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중에 추석을 맞았다. 추석 연휴, 사람들은 명절을 맞아 친지들 집에 간다, 송편을 먹어야 한다며 부산을 떨었다. 거리에도 온통 즐겁게 웃는 모습들 뿐 이었다. 오직 우리만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잃을 것도 없이 버려 진 듯했다. 서글펐다. 간장 종지 하나로 남은 추석이, 우리의 초라한 삶이....... 우 리 중 누구도 이런 삶을 살고 싶어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돈이 너무나도 궁하였기에 형과 나는 학교를 그만두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 민했다. 우리는 절박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여지껏 고생하며 공부해왔던 시간 들이 너무나 아까웠다. 거구나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바로 두 달 앞에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공부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눈 을 뜨면서부터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엉킨 실타래였다. 도저히 풀 길 없어 보이는...... 고심 끝에 나와 형은 언론사에 편지를 뛰우기로 마음 먹었다. 여론 시대에 가 장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곳은 언론사라고 생각 했기 때문에, 그러나 언론사 에 편지를 슨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 변치 못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 편지를 보 내고 난 뒤 기다림의 시간은 길었다. 어느 날 한 곳에서만 연락이 왔다. SBS TV의 '행복찾기' 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에 출연한 후 우리집 사정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도움 의 손길을 보내준 고마운 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반찬이 없던 우리집에 김치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쌓여 갔다. 고춧가루를 가져다 주셨던 할머 니, 정성스레 맛있는 반찬을 싸주셨던 분들...... 무엇보다도 고마웠던 것은 그분 들의 마음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는 동안 고3의 날들이 갔고, 10월의 끝에서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운명의 날 11월 19일, 대학수학능력 시험뿐이었으므로, 그동안 이런저런 일 들로 인해 못 했던 공부를 만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수능 시험...... 그리고 그후 할머니의 돌아가심과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시간을 많이 소비했던 나는 부족 했던 공부를 만회하는 데 전념하였다. 시간을 워낙 많이 허비했는지라 대학수학 능력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10월 들어서는 자신이 서지를 않았다. 정신없이 모든 과목들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수능 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거이 모든 과목들이 나름대로는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도 들었으나 아 직도 미진하다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수능 하루 전, 책을 놓았다. 이미 승부가 났다는 생각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에 주력하였다. 그날 밤, 이상하게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선배들의 수능 합격 수기에 보면 수능 전날 밤, 긴장이 되어 새벽 몇 시까지 잠을 이루 지 못하였다고들 했다. 그래서 나도 내심 수능 시험 전날 밤의 긴장된 분위기 를 상상해 왔는데 긴장이 되지를 않으니 도리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긴 장이 안 된다는 사실만이 나를 약간 긴장시킬 뿐이었다. 형과 나는 목욕을 하고 12시에 잠자리를 들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아침을 먹고 시험 장소인 성리 중학교로 출발 했다. 아버지께서도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우리와 같이 집을 나서셨다. 교문 앞 에는 무척이나 많은 학부모와 응원 나온 각 학교의 후배들로 장사진을 이루었 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멈추어 마주보고 섰다. 아버지께서 말 씀하셨다. "긴장하지 말고 그냥 평소처럼 문제를 대하면 돼. 알았지?" 다 잘 될 거야. 난 너희들을 믿는다." "예, 아빠.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세요. 저희도 시험 보러 들어갈께요." 수능 시험장 앞에서 전에 없이 더욱 깊게 패인 아버지의 주름과 어느새 희끗 희끗해진 머리를 보니 지난 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침마다 아프신 몸으로 도시락을 사주시던 아버지, 밤마다 머리가 터지는 듯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당신 의 아들이 걱정할까봐 신음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던 아버지...... 코끝이 시큰했다. 햇살 아래 드러난 주름살과 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냥 보기에 도 쇠약해진 그 모습이 고스란히 내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아버지께 눈물을 보일 것 같아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어 릴 때부터 눈물이 많은 나였지만, 어려운 생활을 겪어오며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해오던 터였 다. 난 입술을 꼭 깨물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며 빌었다. 평탄치만은 않던 나의 고교 시절에 대한 결실을 맺어야 할 때가 왔으니 이번 시험이 아버지와 나를 걱정해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리고 이번 시험으로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 행복으로 바뀌 게 해달라고. 시험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정말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 다. 모두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자신이 꿈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에 신중한 표정들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작 준비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곧이어 감독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시험이 시작되 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이 첫 시간이었다. 수학능력 시험 이후 집에서나 학교에서의 그 꽉 죄인 분위기는 사라져 버렸 다. 모두들 느슨해진 듯 보였다. 자신의 성적에 대해 아쉬워하는 한 축이 있었 고,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왔다며 대학 고르기에 여념이 없는 한 축이 있을 뿐 이었다. 나의 수능 시험 성적은 358.6점이었다. 그리 잘 나온 편은 아니었다. 평소에 이런저런 일로 준비가 미진했던 탓도 있었지만, 내가 시험에 신중히 임하지 못 했던 탓이 더 컸다. 시험 당일엔 다 맞았을 거라 자신했던 수리탐 구 영역1도 80점 만점에 불과 70점밖에 점수를 얻지 못했다. 요행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제 실력도 다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아 서운하였다. 그렇지만 형이 378.9점을 맞아 다행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형과 나에게 닥친 최대의 고민거리는 진학 문제였다. 형의 성 적은 서울대에도 능히 갈 수 있는 정도였기에 망설임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 러나 난 이미 수능 시험을 보기 전부터 서강 대학교로 갈 마음을 먹 고 있었기에 마음은 편하였다. 수능 시험을 보기 전, TV에 방영된 우리들의 모습을 보셨다며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로 직접 찾아오신 서강 대학교 총장님과 입학처장님의 모습은 내게 아 주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분들은 결코 서강 대학교에 오라고 강 요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무엇 보다도 감동을 받은 것은 총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모습에서 어떤 권위 의식 이나 위압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통 서울의 유수의 대학의 총장 이나 교수라는 직책에 있으면 자기자만과 오만에 빠지기 쉬울 텐데 그분들에 게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던 것이다. 난 그런 그분들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감사를 드렸다. 그 일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얼마나 기쁘 셨으면 당신이 여태까지 살아오시면서 그날처럼 기쁜 날은 없었다고 까지 하셨 을까? 그 동안 기뻐하고 즐거워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우리 가족 이 간만에 가져본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우리에게 그렇게 큰 기쁨과 웃 음을 주신 그분들이 너무나 고마웠기에 꼭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난 서강대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내 수능 시험점수가 기대에 못 미치게 나온 것도 나보고 딴마음 먹지 말고 서강대로 가라는 하늘의 뜻일는 지도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도 자주 해본다. 요행으로 성적이 엄청나게 좋게 나 왔다면 오직 서울대만 눈에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나에 비해 형은 쉽게 진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점수가 상당히 높았으므로 서울대와 서강대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강대 측에서 서강대 에 입학을 한다면 4년간 등록금 전액 면제, 3학년 2학기 이후 해 외 유학 등 다양한 지원을 약속해 형 역시 고심 끝에 서강대로 결정했다. 결 국 형이 특차 전체 수석, 나는 특차 법과 수석이 되었다. 그 이후 지금은 우리들 모두 우리의 선택이 옳았고 또 현명했다고 믿고 있으 며 만족해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전에 없었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대학에서의 새로운 생활과 도전 앞에서 이제 또 어떤 날들이 우 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어떤 고통이 닥치더라도 맞부딪혀 헤쳐나 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그리고 깨닫는다. 고통을 감내하며 통과하는 시절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내 앞 날에 새살로서 살아 오르는 것임을! 제 2 장 나의 아버지 마르지 않는 꿈의 원천 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간직해 온 꿈이 있다.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사 회를 만드는 것이다. 빈부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가난한 사람이 없는 사회, 신분 이나 가정환경, 지역파벌을 떠나 오직 그 사람의 능력에 따라 평 가될 수 있고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 그러나 능력 없는 사람을 도외시하지 않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나의 꿈이다. 물론 이것이 불과 몇 년 혹은 몇 십 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위에서 말한 사회를 후대의 사람들이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굳은 반석을 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해 할 것이다. 사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다소 유 토피아적인 세계관은 모두 나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나이 이상형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아버지는 내가 추 구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평소에는 온화하시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불같이 무서워지는 분,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더 정의감 강하시고 가슴에 뜨거 운 정열을 가지신 분, 그리고 정또한 많으신 분, 그런 분이시기에 언제나 아버 지는 내가 커서 이뤄야할 목표였던 것이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를 닮기 위해 노력하였다. 아버지의 습관, 태도, 생각 등 아버지의 모든 것을 내 안에 담고 싶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꿈도 아버지의 꿈과 같아져 버렸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꿈을 심어 주시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버 지는 인생에서 무엇에다 가치를 두어야 하는가 또 인간에게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깊이 있게 설명해 주셨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므 로 지금 내가 그런 유토피아적인 꿈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즉 내가 바라는 모든 꿈들의 원천은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꿈이란 원대하고 클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사람도 역시 그 꿈을 따라 크고 원대한 인간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사회 만들기'라는 큰 꿈을 주셨다. 절대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마르지 않을 큰 꿈을. 당신의 아 들이 크고 바른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을 양분으로 크는 꿈 을 내 가슴에 심어 주신 것이다. 옥상 가옥 위에서 벌어지는 대화 마당 우리집엔 정규 대화 시간이 있다. 저녁 9시만 되면 세 식구가 모여 앉아 짧든 길든 간에 꼭 대화를 나눴다. 대화 시간을 9시로 정해 놓은 것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분초까지 아껴가며 생활을 해야 하는 고3 시절. 그 시절에서의 승패는 바로 시간 조절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시간 활용이 중오하고 또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것도 사실이다. 그런 때에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어찌보면 어리석은 짓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 낸 것이 식사 시 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을 9시로 정해놓으면 어차피 밥먹느라 버리 는 시간에 뉴스도 보고, 아버지와 대화도 나눌 수 있어 시간 절약에 아주 효과 적이었다. 그것은 빽빽하게 돌아가는 고3 시절에 살아 남기 위한 1석 3 조의 생존전략 같은 것이었다. 대화 시간은 보통 30분에서 1시간 정도였다. 때로는 1시간이 넘는 경우도 있 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공부 때문에 소원해지고 서로에 게 무관심해지기 쉬웠던 부자지간이 짧지만 날마다 나누었던 대화로 언제나 가 깝게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나누었던 그 대화들은 나에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내게 커다란 소득이었다. 대화의 형식은 나나 형이 사회에 대해서 모르 는 것이 많으므로 주로 우리가 질문을 하면 아버지께서 대답해주시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화의 주제는 매일 9시 뉴스를 보며 나누는 대화이다보니 현 정치 나 경제 등 사회가 돌아가는 형세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께서는 특 별히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다. 형과 나는 어렸을 때는 별로 안 그랬는데 머리가 커갈수록 정치, 경제 등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지금은 제법 귀를 귀울이게끔 되었다. 정치나 사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될 수록 가장 먼저 눈에 뛰는 것을 부조 리와 모순이었다. 옳지 못한 일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 버지를 닮은 아들들이니 뉴스를 보다가 비뚤어지고 잘못된 사회상 비치면 어 김없이 그것에 대해 분개하고 비판하였다. 이 과정에서 비판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판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비판이라 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고의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 에, 비판 자체를 거부하거나 배척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잘못된 비판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비판 혹은 상대방이 나를 비판하였으므로 나는 나도 그를 비판한다는 식의 비판 등 비판 의 목적이 옳지 않은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 같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된 비판의 모습이 아예 존재하 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비판의 모습이 우리의 일상에 서보다 나라를 운영하고 다스리는 곳에 만연해 있다는 데 그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가족의 대화에서 나타난 비판은 잘못된 모습을 바로 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시간 죽이기나 비판을 위한 비판은 아니었다고 본다. 4평 남 짓한 옥상 가옥 위에서 벌어지는 대화각 한 나라를 운영한다는 분들의 대화보 다 나아서야 되겠는가? 나는 일상의 과정과정에서 배우는 이런 하나하나의 것들을 결코 소홀하게 생 각하지 않는다. 그건 언젠가 나의 꿈을 이루는 날까지 나를 지탱해 줄 올바른 자양분이 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대화 시간은 나 에게 꿈을 심어주신 아버지께서 내 꿈에 끊임없이 물을 주신 일임을 새삼 깨닫 는다. 나를 벅차게 하는 깨달음이다. 아버지, 오, 아버지 보충 교재와 어머니의 자리 고등학교 1학년 생일 즈음에 아버지께서 뒷머리가 아프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다 점점 아픔을 호소하시는 주기가 짧아지더니 고3 때에는 자리에 눕는 경 우가 많아졌다. 그렇게 누우신 후는 병세가 악화되는 것이 눈에 뛸 정도롤 빨라졌다. 그러다가 결국 좌반신 마비 증세까지 나타났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편찮으셨으니 우리집 경제적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 이었다. 아버지와 우리들은 서류함 서랍에 우리집 전 재산을 넣어 두고 생활하 였다. 전 재산이라고 해봤자 2,3만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돈이 없다 보니 보충 교재를 사야할 대가 되면 가장 골치가 아팠다. 보충 교재를 사기는 사야 하는데, 우리집 금고를 열어 보면 그건 늘 불가능해 보였다. 한 권에 7,8천 원씩하는 교재를 몇 권 사고 나면 돈이 바닥 나 하루 세 끼 밥먹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워낙 배움에 대해 서는 열정이 많으신 분인지라 말씀을 드렸다면 밥은 못 먹을 망정 책을 사라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 워(?)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렇게 책을 사지 못해 혼자 끙끙 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에 학습용 참고서는 보통 선생님께 얻어 쓰곤 하였는데, 보충 교재는 교 사용으로 오는 것이 적어 선생님께 얻기도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구하다 못 구한 보충 교재는 다른 반 친구들에게 빌려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빌려쓰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이따금씩 보충 교재 를 검사하는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보충 교재의 여부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가지도 확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학교 내에서 남의 보충 교재를 훔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책 검사를 할 때, 내 차례가 되면 난 빌려온 보충 교재를 책상 속에 넣은 채 깜박 잊고 집 에 놓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선생님께 질책 을 받거나, 교무수첩에 내 이름이 올라야 했다. 돈이 없어 책을 사지 못하였다 고 말하는 것은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가난하다는 것 을 모르는 반친구들 앞에서 차마 돈이 없어서 교재를 못 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가난이 창피나 부끄러움, 회피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나의 몸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돈이 넉넉치 못해 보충 교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좋 은 옷이나 좋은 음식을 못 입고, 못 먹는 그런 물질적인 불편은 사실 그리 큰 아픔은 아니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그때그때 생활해 나가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나에게 가장 큰 아픔을 주었던 것은 어머니의 자리가 비어있다 는 것이었다. 사실 실제 생활 속에선 나는 그 빈 자리에 무감각한 편이었다. 어머니의 따스한 품을 맛보지 못하고 자란 탓일까?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계셨지만 할머니와 헤어진 이후로도 도통 어머니 품이란 걸 몰랐다. 어린 시절, '엄마 찾아 삼만 리' 주인공이 엄마를 찾아 다니며 우는 모습을 볼 때나 다른 연속극 중의 인물들이 엄마를 그리며 울 때마다 나도 TV의 인물들처 럼 엄마를 찾으며 우는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매번 눈물을 흘 리는 데 실패했다. TV속의 인물들이, 그 마음들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있는 빈 공 간, 엄마만이 채워줄 수 있는 빈 공간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자라 면서 엄마가 그리워서 혹은 엄마의 빈 자리가 허전해서 TV속 주인 공들처럼 괴로워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씩 그 빈 자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학년 말 종업식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날이 되면 학부모님들이 오셔서 교실 뒤에서 행사를 지켜보셨다. 선생님의 호령에 따라 앞으로 나간 아이들은 저마다 부모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개근상을 받거나 선물을 받았는 데, 그 얼굴마다 뭔지 모를 행복감과 자신감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자리로 돌 아와 앉으며 뒤에 계신 부모님과 눈웃음을 주고받는 그들이 얼마 나 부러웠는지...... 그 부러움은 지금도 형용하기 어렵다. 난 번번히 선생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지 말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하지만 예외없이 선생님께 호명된 나는 앞으로 나가 개근상이나 우등상을 받아 들고서 부질없이 교실 뒤쪽을 쳐다보곤 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 까지 시선을 주어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따뜻한 눈웃음을 주시는 나의 어머니는 어디에도 계시지 않았다. 식이 끝나면 아이들은 각자 부모님 손을 잡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형과 만나서 둘이 학교를 걸어 나오곤 했는다.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작아보이던지 그저 빨리 학교를 나가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 조그만 가슴에 고이는 쓸쓸함은 본 한가운데서 느끼는 멀미 같았다. 고3 졸업식 날은 조금 달랐다. 그날은 우연이네 부모님이 형과 내 옆에 계셔 주셨다. 나와 형에게도 친자식처럼 한아름의 졸업 축하 꽃다발을 안겨 주셨고, 사진도 찍어 주셨다. 형과 나에게는 전에 없이 기쁜 졸업식이었다. 그러나 부러움은 말끔히 사라질 수는 없었다. 우연이나 다른 친구들이 투정부 리듯이 부모님께 큰 소리치는 그 모습은 여전히 가져다 볼 수 없는 부러움이었 다. 문득 내 삶이 서러워졌다. 나는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투정을 부린 적도, 떼 를 쓴 적도 없었다. 나도 한번쯤은 엄마. 아빠 앞에서 투정도 부리고, 떼도 써 보고 싶었다. 내 친구들이 나이고, 내가 내 친구들 자리에 있었더 라면 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 난 여전히 불완전하고 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졸업식을 마치고 형과 나는 우연이 어머님의 따뜻한 배려로 우연이네 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연이네 집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집에 계신 아버지는 분명 당신의 아들들을 애타게 기다리시며 아직 점심을 안 드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과 나는 우연이 어 머님의 호의를 거절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결국 우연이네 집에서 점심 먹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서글프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과는 다 른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나의 아버지가 계셨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주어진 나의 길,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있었다는 걸...... 그것을 깨닫는데 19년의 세월이 필요했었구나. 그런 생각으로 저문 날이었다. 지금도 TV에서 엄마, 아빠와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때면 여전히 나 는 그 모습이 부러워진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이 아프지는 않다. 나에게는 나의 가족과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 몫의 삶이 있는 것이기에.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떤 한 인간이 절망과 고통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전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작은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또 그 작은 행복에 감사할 줄도 알게 되기 때문이 다. 마치 공기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이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행복과 안락 함에 젖은 인간은 그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어려움으로 인해 고뇌의 늪에 빠졌던 이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된다. 만약 어떤 이가 가난으로 인해서 절망에 빠졌었다면 그는 가난한 이들을 같은 눈높이에서 사랑으로 아파하는 이들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간접체험이 아니라 직접 체험이다. 나 역시 지난 고교 시절 동안 힘들고 어려웠던 적이 참 많았다. 집안의 경제 적 여건 때문에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들을 겪고 난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지난 날 겪은 고통들이 내 삶에는 오히려 큰 도움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나의 이런 말들은 그런 힘들 었던 일들을 이미 겪고 난 후에야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나에게는 망나니 기질이 있다. 잠이 많고, 게으른데다가, 의지력이 강하지 못 하고, 우유부단한 것, 이것이 내가 바라본 나이다. 내가 나 자신을 바라봐도 참 으로 못난 사람이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 내가 만약에 부잣집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흔히들 말하는 부잣집 망나니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우리집 같은 데서 태어난 것은 어찌보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때로 잠이 몰려와도 가난과 힘든 일들이 연달아 있었기에 나는 잠잘 수 없었고, 게으르고 싶어도 게으를 수 없었다. 우유부단하고 싶어도 흑 아니면 백이어야 하는 극한 상황이 많았기 에 우유부단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지내다보니 나의 망나니 기질 도 많이 누그러졌고, 나 스스로 그것을 어느 정도 자제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들 이외에 그 동안의 시간들이 나에게 일깨워 준 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아버지의 반쪽만을 알고 있었다. 자존심 강하고, 정의감이 강하신 분, 그리고 때로는 무척이나 엄하신 분이라고 말이다. 나이 어린 아들들 을 혼자 키워내는 동안 아버지께서 겪으셔야 했던 고통과 그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사랑의 크기를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3년간의 고난은 우리와 아버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아버지의 나머지 반쪽도 찾게 해주었다. 그 반쪽은 바로 당신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읽을 수 있게 된 건 가 난과 고난이 나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다. 우리는 견디기 힘든 고난이 닥칠 때 마다 서로 의지했고, 작은 기쁨이나마 생기게 되면 그것으로 세상의 어떤 부호 보다도 더 행복해 하였다. 그런 순간순간이 모여 나를 깨우치게 한 것이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는지 말이다. 아버지의 눈에 고인 당신의 아들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 이제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아버지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꽉 짜여진 학 교라는 공간과 가슴을 옥죄는 답답한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나의 마 음 속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내가 힘들 대나 정신적으로 방황할 때 면 언제나 아버지께서 내 중심을 잡아주셨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휴대용 카세트를 사오신 일이 있었다. 난 아버지께서 카세 트를 사오신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말은 안 하셔도 괴롭고 고달팠을 마음을 음 악으로라도 달래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나의 그런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카세트를 사오신 날부터 아버지는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몸이 성해도 아버지 연 세에 이르러서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상이 바빠서일 수도 있고, 영어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자신이 수 십 년 동안 말하고 들어 온 모국어 외에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고, 말 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새로운 언어를 당장 필요치도 않은데 고통스럽게 배우 려고 하는 것이 잘 납득되지 않았다. 어떤 때는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편찮으신 분이 영어 공부를 하다가 건강이 더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나, 왜 굳이 아픈 몸으로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등등의 의문이 가시질 않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얻는 데는 그 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느 날처럼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공부 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내 영어 사전을 빌리러 오셨다. 사전 을 꺼내드리는데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영어를 공부하면 마음이 편해진단다. 지금 배워둔 영어가 언젠가 내 몸이 나 아 다시 예전처럼 사회 생활을 하게 될 때 유용하게 쓰이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랬다. 아버지는 희망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철저하게 영어에 매달리 신 것은 반드시 영어를 마스터하게 마스터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죄어오는 현실의 무게를 이기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 자체가 아버지께는 더 욱 중요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영어 공부를 하시는 의미를 그때서야 어렴 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공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아니 그것은 진지하다는 것의 차원을 넘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영어라는 것에 완전히 몰입된 모습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언제나 영 어공부를 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몸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못하시게 되는 경우 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열심이셨다. 그런데 그렇게 영어공부에 집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보기 좋을 때도 있었 지만, 그보다는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았다. 희망은 분명 힘을 주지만, 사실 아버지께서 배우시는 영어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올지 안 올지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그토록 영어에 매달리시는 모습은 종종 내 가슴을 젖 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틀림없이 나에겐 큰 힘이 되었다. 때로 그 자 리에 풀썩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면 아버지의 그 모습이 나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가끔씩 마음이 나태해지고, 긴장이 풀려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때 방문 하나 건너에서 열심히 회화 테이프를 들 으며 영어에 몰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에 임할 수 있었다. 결국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요즈음도 가끔씩 영어공부를 영어 공부를 하시던 그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떠 올려 본다. 그때는 내내 안쓰러웠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 다시 돌이켜 보던 그건 어려운 현실을 이기려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의 얼굴엔 전같지 않게 깊은 주름이 패여 있다. 희끗희끗한 흰머리도 눈에 띄게 늘었다. 한층 수척해지신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깡마른 손에 눈길이 닿을 때면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이제는 지난날엔 결 코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스무 해 동안이나 가려져 왔던 아버지의 그 쓸쓸한 어깨가 보이게 된 것이다. 스무 해 동안이나 가려져 왔던 아버지의 그 쓸쓸한 어깨가 보이게 된 것이다. 왜소해진 아버지의 어깨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 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어쩌면 나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아버지 의 사랑과 뜻을 제때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께 슬픔을 안겨드리고 서 뒤늦게 야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렵다.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존 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서든 지 혹은 몰라서든 지 옳은 길보다는 그른 길로 가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미 지나간 날들이지만 한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아버지를 속이던 내 모습,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아 아버지의 애를 태우던 내 모습,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아버지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모습이 회한처럼 남는다. 나는 참으로 미욱한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왜 그리 모난 아들을 사랑하시는 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 제 3 장 고마운 사람들 예전에는 자주 느껴왔지만 난 참 행복한 녀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주 위에는 항상 나를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분들과 내게 좋은 귀감이 되는 훌륭한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분들 덕택에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항상 가슴에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랬기에 내가 가야할 길 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분들의 이야기, 따뜻한 감사를 표하고 싶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 집안 사정이 어려워짐에 따라 내 내면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게 일어난 변화 중에 스스로도 놀라웠던 것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리마다 즐비한 거지들이나, 길가에 스러져 아무렇게나 자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들을 보면서 왜 저들이 저렇게 살아야 하 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또 등이 굽은 채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스런 표정 으로 길을 걷는 할머니의 모습이라도 보게 되는 날에는 '왜 우리 인간들은 늙어서 저렇게 초라해져야 하는가' 라는 번민으로 하루종일 괴로워했 다. 그러면서 차츰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인간의 사후에 대해서, 우리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광대하고 유구 한 우주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모래알처럼 작고 짧은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으 로 인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못 할 때도 많았다. 행여나 책 속에 그 해답들이 있을까하여 철학책을 읽어보기도 했으나 그것도 역시 근본적인 물음에는 대답을 못하고 주위만을 매돌 뿐이었다. "이승의 일도 다 모르는데 내가 어찌 저 세상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 사후세계에 대해 물어온 제자에게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는데, 나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이대로 맹목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가라는 고민이 떠나질 않았 다. 그 무렵 학교에서 신앙수련회가 있었다. 예기치 않았던 그곳에서 나는 내 고 민에 불을 밝혀 줄 섬광을 발견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느껴야 하며 모든 것을 우리 주님께 맡겨야 한다." 외부에서 오신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 한 마디가 내 뇌리에 칼처 럼 박혀버린 것 같았다. 난 설교가 끝나자 마자 목사님께 달려가 하나님을 믿 으면 우리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목사 님은 웃으며 우리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웃 으며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그날 이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교 회에 다니기로 마음먹고 나가기 시작한 곳은 창신동에 있는 동 신 교회였다. 그런데 그곳의 고등부 담당 목사님이 바로 내가 다니던 대광 고 등학교의 윤리 선생님이자 교목이신 서은종 목사님이셨다. 서은종 목사님과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목사님께서는 무척이나 우리를 아껴주셨다. 우리집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아시고는 교회 장학금을 주선해 주시는가 하면, 종종 우리의 보충 수업비 같은 것도 대신 내주곤 하셨다. 그후 교회를 다니던 나의 생각에 변화가 왔고, 또 고3이 되면서 바빠지게 되 는 등의 이유로 교회 출석이 뜸하게 되었다. 교회 출석 문제 때문에 서은종 목사님의 속을 무척이나 상하게 해드렸다. 그러나 그 목사님께서 영 신여자고등학교로 전근하시게 되었다. 고마움과 죄송스러움이 얽힌 채로 목사 님과 헤어지는 마지막 날까지 그 동안 고마웠다는 말씀 한 마디 제대로 못 드 렸다. 어떤 연락도, 만남도 없게 된 지금껏 나는 목사님께 죄송스러 운 마음을 벗을 길이 없다. 내 고등학교 생활에 기둥이 되어 주셨던 또 한 분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셨던 유영민 선생님이 계시다. 그분은 무척이나 자상하고 훌륭한 분이셨다. 평소에는 농담도 잘하시고, 잘 웃으시지만 진지해야 할 상황에서는 참으로 진지해지는 분이셨다. 그런 모습들 때문이었을까? 유영민 선생님을 대할 때면 언제나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글 것은 선생님과 아버지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아서일 것이다. 아버지처럼 선생님께서도 내게 자주 '고난은 오히려 축복일 수가 있다' 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 당시 나는 속으로 '고난은 고난이지 어떻게 행복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시 우리 가정이 풍족하고 안정된 가정 이었더라면 유영민 선생님과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그저 스쳐 가 는 한 사람이 되고 알았을 테니까. 선생님은 우리집의 경제적인 사정을 아시는 터라 그 부분까지 세심하게 배려 해주시곤 했다. 우리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외국인 강사가 진행하는 영어회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전교생이 그 수업을 듣는 것은 아니었다. 그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상당한 액수의 수강료를 내야 했기 때문에 신청자에 한 해서 수업을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에게 영어회화 수업을 듣고 싶냐고 물 으시기에 그렇다고 대답하자 내 영어회화 수강료를 선뜻 내주셨 다. 덕분에 나는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상당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무엇 보다 가슴을 전달된 선생님의 그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고마우신 선생님! 위에서 말한 두 분 이외에도 내겐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 많이 계셨다. 항상 형같은 느낌을 주시던 강태형 선생님, 키는 작으시지만 마음은 넓으신 이건홍 선생님, 겉으로는 엄하시지만 인정이 많아 언제나 학생 입장에서 생각해 주시는 박부남 선생님, 친절하신 이금주 선생님, 그 외에도 이창환 선생님, 이기서 선 생님, 유우정 선생님, 박준용 선생님, 정봉규 선생님 등 우리 학교에 계신 분들 모두가 훌륭하고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그분들께선 도움을 주실 때마다 하나같이 말씀하셨다. 지금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라고, 내가 받은 이 도움을 언젠가 사회에 환원 시키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아도 선생님들 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가 받은 그 사랑과 도움들을 언젠가 나보다 더 못한 사람 들에게 나누어주는 그것이 은혜를 갚는 가장 바른 방법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제자가 더욱 큰 그릇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바로 모든 선생님들 의 마음이 아닌가 한다. '청출어람'.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이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우리들의 선생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지면을 빌어 그 동 사랑과 따뜻한 관심으로 가르치고 지켜 봐주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두 번째 이야기- 어떤 눈먼 분의 가르침 현대 사회를 매스미디어 사회라고 부른다. 또 '대중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라는 말도 자주 듣게 된다. 전에는 그것을 그저 심상하게 들어 넘겼었는데, 막상 형과 내가 SBS TV의 '행복찾기'를 필두로 각종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게 되 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신문이나 TV에 보도된 것들이 거짓된 것은 없었으나 우리의 지난 일이 그렇 게 보도되고 나니 우리가 마치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 다. 사실 우리가 언론매체에 많이 실리긴 했지만 그건 결코 우리가 특별히 잘 났다거나 성적이 아주 뛰어나서 그랬던 것이 아님을 안다. 우린 그저 갑남을 녀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함을 안다. 물론 우리들이 남들과는 다르게 힘들고 어려웠던 고등하교 시절을 보낸 것은 사실이나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뛰어난 학생들도 많을 터인데 우리가 이렇게 올해 최고의 학생인 양 되어버린 데에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부끄러운 가운데서도 그것이 나나 우리가족에게는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나와 형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서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TV나 신문에 나온 이래 많은 문들이 우리 가족을 돕고 싶다며 연락 을 주셨다. 그 중 인상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느 분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1998년 1월 21일, 형과 나는 '한선교의 좋은 아침'이라는 TV 프로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 우리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떤 여자 분이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맑고 명랑한지 전화를 받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자신은 갓난아이를 둔 아기엄마라고 소개한 뒤, 전날 그 TV 프로그램을 우연히 듣고 연락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듣게 되었다고?' 순간 이상했다. '보게 되었다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하고 있 는데, 그분께서는 자신은 맹인이라고 하셨다. 그분의 남편 역시 맹인인데 장애인 학교에서 교사로 일을 하고 있으며, 지금 그분들은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고등 학교 시절, 책을 읽을 수 없어 친구들에게 부탁해 책을 읽어달라고 한 후 그것 을 녹음해서 공부를 했을 때 빼고는 불편했던 적이 전혀 없었다고 하시면서 웃 으셨다. "눈이 보이지 않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시며, 그분은 나에게도 나의 가정 환경이나 지나온 시간들을 원 망하지 말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욱 열심히 살았으면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나서 우리들에게 김을 보내주고 싶다고 하셨다. 시골에서 가끔 김이 올라오는데 그것을 먹을 사람이 없어 우리들에게 보내주고 싶다면서 우리집 주 소를 물으셨다. 그분은 맹인이므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말해 드려 도 적어 놓을 수가 없으니 외우거나 내 목소리를 녹음해 두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 그 사실을 잊은 채 그냥 보통 사람들에게 말하는 식으로 주소와 전화번호를 말해버렸다. 내가 아차 싶어 당황하고 있는데, 그 분은 단 한 번 들은 것을 외워서 내게 말하며 자신이 외운 것이 맞냐고 물었 다. 정확했다. 그냥 스쳐가듯 말한 것을 그 자리에서 외우다니 굉장한 기억력이 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므로 남들에 비해 기억력이나 청각이 상 당히 좋을 뿐이라며 웃는 그분은 전화통화를 마칠 대까지 시종일관 너무나 밝 고 맑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분의 실제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있건만, 마음은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분이 보내주시겠다던 김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주소를 쓰는 과정에서 문제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김은 받지 못했어도 난 그분께 감사드린다. 나에게 큰 빛과 반성의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전화 통화 이 후 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말고 밝을 수가 있을까? 사지가 멀쩡한 우리들도 작은 불편에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일쑤인데...... 난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불우한 가정 환경을 탓하며 방황했던 지난 시절을 반성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께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가끔 '진정 아름다운 인간은 누구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들이 내리 는 '아름다운 인간'이라는 정의는 너무 외적인 것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 물론 수려한 외모도 분명 아름다움의 하나인 것은 사실이나 그건 아름 다움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외적인 것은 일시적 이고, 내적인 것은 반영구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는 마 음이 아름다운 이가 아닐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해서 방황하던 사람이 하루가 빛날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그의 일생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식구가 그랬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나오고 난 뒤 우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셨던 많은 문들로부터 우리가 받은 것은 바로 그러한 따뜻한 빛이었 던 것이다. 이름을 알리지 않고 도와주신 분들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을 받을 때마다 그 따뜻한 마음으로 인해 때로는 외롭고, 고통스 럽게 지내왔던 우리 가족의 시간들이 더 이상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분들 의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받기에는 내가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란 점이 많은 것 같아 항상 죄송스러웠다. 또 도움을 주시는 분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도움 을 주시는 분들이 모두들 그다지 부자가 아니라는 것과 항상 밝다는 점이었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남을 돕는 사람들은 거의가 경제적으로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마음은 더욱 차가워지고 인색해지는 것인가? 그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점이었다. 또하나 쉽게 수긍되지 않았던 것은 내가 만나본 그들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움 에 찌든 표정이 아니라 언제나 웃음이 있었다는 점이다. 돈이 많거나, 가지고 있 는 땅이 많은 이들이 아니었는데도 그 얼굴은 참 행복해 보였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소유한 게 많아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난 여태까지 위대한 인물은 고독하여야 하고 무엇인가 심각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 위대한 인물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분들이 깨우쳐 주셨다. 내가 어떤 작은 일에 감사하며 웃음으로써, 그 웃음이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또 그것이 또 다른 이에게 전달되고...... 이렇 게 된다면 우리 나라 나아가서는 온 세상 사람들이 웃으며 살 수도 있을 것이 다. 지금 나의 이 진술은 너무나 환상적이라고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해 비관보다는 낙관을, 슬픔보다는 기쁨을, 불평불만보다는 감사와 만족을 느 끼고자 노력할 때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사회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아름답고 밝은 미래는 내일의 거창한 계획보다는 오늘의 작은 미소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는 다짐해본다. 반드시 완벽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작은 것들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지금 여기에 이런 말을 하는 나부터도 사실은 그리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일상에서 작은 미소로 행복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그런 나를 드러내는 것은 내가 그렇게 변화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름 다운 내면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그 아름다움의 결정체만큼이나 아름답다 고 여겨지기에. 제4장 나의 길 며칠 전 TV에서 'PD 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 서울역과 강남역 등에서 살고 있는 걸인들의 모습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걸인들 중에는 말끔한 신사복 차림을 한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그들은 요즘 경제불황 으로 인해 사업이 망하거나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직장을 잃고 거리를 배회하 게 된 이들이었다. 갚아야 할 많은 빚과 가족들에 대한 자존심 때문에 집에 들 어가지 않은 채 그렇게들 지내며, 언젠가는 다시 재기할 것을 꿈꾸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재기는 어려워 보였다.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 렇게 한 번 걸인이 된 사람은 처음에는 재기의 기회를 노리며 나름대로 노력을 하지만, 배고픔과 추위로 고생하면서 육신은 병들어 예전의 모습 을 잃고, 다시 일어서겠다는 야망 또한 없어져 결국 영원히 걸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몇 백원의 돈이라도 생기면 소주 한 병을 사먹고, 술의 힘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일적으로는 가리지만, 술이 깨고 난후 그에게 닥치는 현실은 전보다 더한 배고픔과 추위이다. 그러다 보면 지칠대로 지쳐 다시 일어서겠다는 처음의 마음 역시 사그라지는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 이미 그는 한낱 병들고 술취한 거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에게 도움을 베풀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다가 어디서 얼어죽거 나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죽게 되어도, 혹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해서 자살을 한 대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이는 없는 것이다. 무능력해서건 게을러서건간에 그곳의 걸인들은 그렇게 사라져 갈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거기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혹시 그에게 자식과 아내가 있다면, 그의 아내는 어린 자식들을 홀로 키워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 러다 너무 힘들어 자식들을 버린 채 고통으로 세상에 부딪치다가 타 락해 버릴수도 있다. 그런 아이들에게 세상이 줄 것은 불량아라는 낙인뿐, 그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눈물과 고통을 보상해 주지는 않는다. 부모의 피눈물이 다시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피눈물로 남는 질곡의 역사가 계속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분명 수많은 걸인 있으며, 그들 중에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힘들고 어려 운 삶을 살아 온 이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두고 흔히 능력없는 놈 이라서, 병신이라서, 머저리 같은 놈이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과거의 어느 한때, 세상에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처음 나 와 부모와 그 누군가의 축복을 받았을 '인간'이다. 그가 걸인으로서 때에 찌들어 죽게 되는 결과만을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 인간의 삶의 과 정과 그가 겪은 고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 테이블에 몇 백만 원씩하는 술집에는 자리가 없어 손님을 받지 못하는데, 다른 어딘가에서는 밥 한 끼를 못 먹어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모순 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는 그 모순이 실제로 존재한다. 어떤 이는 수십, 수백 억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뒤로 빼돌려도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 데, 어떤 이는 빵 한 조각을 훔쳐서 교도소에 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 이다. 그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에게 돈과 권력이 있다면 그는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에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을 버려가면서까지도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을 오직 그 가 가진 재물로만 평가하는 천박한 물질만능의 사회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회, 소위 힘있는 자들을 훌륭한 사람이라 여기는 사회는 바뀌어야 한 다. 한 개인의 양심과 노력, 그리고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말이다. 지금까지 의 역사가 재물과 권력을 쥔 자의 편이었다면, 앞으로의 역사는 능력 과 훌륭한 양심을 가진 사람의 역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나가 는 것이 바로 지금부터의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꿈은 검사였다. 그 꿈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검사가 되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너무나 많음에 기인한 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 나갈 사회, 밝은 내일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 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걸 결코 권력을 쥐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공무원이란 본래 국 민이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 나라에 고용되어 녹을 받아먹는 사람, 즉 국민 을 떠받들고 봉양해야 하는 국민의 종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 인지 요즘 공무원은 반대이다. 국민을 다스린다고 생각하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그런 경향을 심해지는 것 같다. 나의 1차적인 꿈인 검사 역시 국민의 종으로서 국민에게 해가 되는 사람들을 바로잡는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 바라고 원하는 사회는 검사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그런 사회이다. 예전에 'The power of one'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1930년대의 미국을 배 경으로 흑인과 함께 자란 소년이 인종차별 폐지주의자로 나서는 과정을 감동적 으로 그린 영화이다. 무척이나 재미있어 여러 번 보아 거의 모든 부분을 기억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이 가장 인사에 남는다. 인종차별 폐지주의자 로 새로운 길을 떠나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비춰지면서 잔잔한 음성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말이 진리였으면 한다. 아직은 어두운 이 세상에 미풍 만 불어도 꺼져버릴 약한 불이나마 빛이 되고 싶다. 잔잔한 호수에 떨어진 작 은 돌이 일으킨 물결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듯 나의 작은 힘이 사람들 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고,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욱 밝게 할 수 있다면 나 의 일생을 모두 바친다해도 아깝 지 않을 듯 싶다. 제3편 쌍둥이의 공부 방법 제1장 후배들에게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대학 입시라는 벽을 앞에 두고 무엇 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 하는 후배들이 많이 있을 줄 안다. 나 역시 불과 몇 달 전에는 대학 입시 때문에 많이 고민하였으 니까. 수험 기간 동안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더욱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많다. 내가 느낀 안타까움 들이 컸기 때문에 내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언제고 그런 것들을 말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기회를 얻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글로나마 그것을 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후 배들에게 약간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 다. 더불어 나와 동생처럼 어려운 형편에서 힘든 고교시절을 보내고 있을 그 누 군가에게 한 줌의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람 나름대로 느낀 것들을 얘기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약간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의 글이 열심히 공 부하고 있을 어느 후배에게 혼란만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앞으로 소개할 내용들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 내가 공부한 방법 역시 마찬가 지이다. 다만 내가 했던 실수와 저지른 후의 후회들을 그저 참고한다는 마음으 로 읽었으면 한다. 공부하는 데에는 각자의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므로... 하지만 공부하는 데 아무리 각자의 방법이 있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는 있다고 본다. 공부에 가장 필요한 요건 주의 하나는 '노력과 꾸준함'이라는 것 이다. 아버지께서는 자주 '노력하지 않는 천재보다 노력하는 백치가 낫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누구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지만 이것만큼 쉽게 잊어버리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지금 대학수학능력 시험의 큰 관문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매우 초조하고 걱정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1년은 길다는 것 이다. 실제로 겪어보니 1년이란 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만큼이나 꾸준히 노력하느냐가 관건이다. 힘든 고3시절에 대한 평가는 대 학수학능력 시험이란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대학수학능력 시험의 결과는 자신 이 얼마만큼 노력했나에 달렸다. 수험생들에게는 금언처럼 여겨지는 말이 있다. 'Steady and Slow' 나 역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장 현명하고 바른 방법이므로 말이다. 그러나 나나 인득이는 꾸준히 공부를 하지 못하였다. 전부터 소위 '벼락치기' 라고 부르는 공부방법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 기말고사를 볼 때가 오면 시험보기 4-5일 전부터 공부를 시작해 시험보는 기간 동안 거의 밤을 세워 가며 공부해 시험을 치르곤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벼락치기로 외웠던 것들은 일주일도 안 되어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만다. 벼락치기는 시간 낭비일 뿐 결코 바람직한 공부방법이 아니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결국 최선의 길을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세 심함과 교과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는 것이다.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 꾸준 히 그리고 천천히 매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슬럼프는 이렇게 극복 '운동'과 '공부'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양쪽 모두 다 꾸준히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중간에 '슬럼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이 그렇다. 운동선수에게 한 번 슬럼프기가 닥치면 점 점 부진한 성적을 내다가 경우에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슬럼프를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그 슬럼프는 그 기간 동안도 문제이지만 그 후가 더 문제이다. 슬럼프 기간 동안 하지 못하였던 공부를 만회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한 공 부를 다시 채우고 여태까지 잡아왔던 원래의 공부 체계로 돌아가는 데에는 보통 슬럼프 기간의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슬럼프는 공부하 는 학생에게도 운동 선수와 같이 치명적인 것이다. 나나 인득이의 경우는 주로 가정적인 문제로 슬럼프에 빠지곤 했다. 내 경우 는 슬럼프 기간이 상당히 오래가는 편이었다. 슬럼프가 와도 하루나 이틀만에 그것을 극복하는 몇몇 선수들에 비해 나는 한 번 슬럼프에 빠지면 그 여파가 보통 일주일에서 많게는 한 달 정도까지 갔다. 그때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였다. 아예 공부를 제쳐 놓 고 놀아버리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고, 친구들 사이에 떠도는 말을 따라 밤을 세워도 보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사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슬럼프란 것이 오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다. 슬럼 프를 오게 할 수 있는 원인들을 제거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 나 그런 것들을 모두 제거시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슬럼프란 것도 그 빈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나가 넘어야 할 산인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러 가지 방법을 써도 효과를 보지 못했으나 내가 효과를 본 방법이 한 가지가 있다. 이른바 '자기 최면'이라는 것이다. '자기 최면'이라 하면, 왠지 거창하고 어려운 방법 같지만 실은 간단하다. 슬럼프 에 빠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할 때, 즉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억지로라도 책상에 않아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가 잘된다, 집중이 잘된다'라고 자신에 게 암시하면서 말이다. 이 방법을 글로 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지만 실제로 실 천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공부가 잘 안 되는데 억지로 공부를 하려고 하면 온 몸에 좀이 쑤시고 졸음이 몰려와 그나마 책상 앞에 않아 있기도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그 힘든 순간을 견뎌내고 하루 이틀이 지나면 내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그렇게 자신을 이겨가며 공부하는 과 정에서 다시 자신의 페이스를 찾게 되는 것이다. 결국 '슬럼프'라는 장애물도 우리들의 굽히지 않는 의지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 아닐까? 내일은 없다 시간을 잘 활용한다는 것, 그것만큼 우리의 삶에서의 중요한 것이 있을까? 특히나 시간이 중요한 고3시절에는 그것의 효과적인 활용이 가장 중요한 문제 이다. 흔히들 고3 예비 수험생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고정관념 이 있다. 고3이 되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건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나 전체적으로는 그리 옳다고 할 수 없는 방법이다. '4당4락'이라는 말이 있다. 하루에 4시간 자고 공부하면 대학에 붙고, 5시간을 자면 대학에 떨어진다는 말이다. 하루에 4시간만 잔다는 것,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무리가 가는 방법 이다. 나도 그런 말들을 들으며 고3 수험생이 되었기에, 힘에 부쳤지만 처음에는 4시간만 자고 공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하루 4시간만 잔다는 것에는 큰 문제가 따랐다. 수업시간에 졸음이 떼로 몰려온다는 맹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려 자기에 바빴다. 그렇게 쉬는 시간 에 자고 수업 시간에 졸은 시간을 모두 합하면 대략 5-6시간 정도가 되었다. 밤에 잠을 4시간만 자므로 내심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였으나 실 제로는 하루 5시간 자고 공부하는 것보다 오히려 1-2시간 정도의 시간을 낭비 하는 셈이 되었다. 따라서 주요한 것은 잠을 자는 시간의 양이 아니다. 잠은 피 로가 풀릴정도로 잔 후에 깨어있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다. '짜투리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 수업 후에 쉬는 10분의 시간처럼 짧은 시간 을 뜻하는 말이다. 사실 고3시절의 시간 활용은 이 자투리 시간에서 판가름난 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3 시절에는 거의 모든 학생이 공부를 열심 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이나 집에서 각자 열 심히 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하니 집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공 부를 하는 것만으로는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다. 나의 실력이 향 상된 것만큼 다른 사람들의 실력 역시 향상되기 때문이다. 고3 학기초,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해서 공부하기 이전에는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차별화'의 방법으로 자투 리 시간의 활용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그 방법은 이러하다. 수업이 6시간 들어있는 날이면, 그 사이사이 쉬는 시간의 총합은 50분이 된 다. 그 각각의 쉬는 시간에 영어 단어를 외우거나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를 풀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을 그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시간에는 오직 바로 전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복습하기를 권한다. 금방 전 에 배웠던 것이므로 복습하기에 10분이란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그 시간에 배운 것들을 쉬는 시간을 이용해 복습하면 집이나 도서실에 가 따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실제로 쉬는 시간을 친구들과 잡담하고 노는 데 보낸 사람들은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별도로 2-3시간을 공부 해야만 그날 배운 것들의 복습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쉬는 시간을 이용한 사람은 이미 그날 배운 것들에 대한 복습이 거의 다 되어 있으므로 집에 가 자 기가 공부할 것을 공부하거나 혹시 복습이 안 된 것이 있다면 한 30분만 시간 을 할애하면 된다. 즉 쉬는 시간을 물 흐르듯 그냥 그렇게 보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하루에 2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쉬 는 시간을 그냥 보낸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한들 하루에 2시간 30분이라는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하나 시간 활용에 도움을 주는 아주 유용한 도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어장이다. 나의 교복 주머니에는 수 험생 시절 도안 내내 단어장이 있었다. 그래서 지하철을 탈 때나 화장싱에 있을 때는 아무 때라도 단어장을 꺼내 보았다. 나의 단어장 활용법은 특히하다면 약간은 특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어자에 오직 영어 단어만을 적어 놓고 다니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난 단어장을 그렇게 활용하지 않았다. 나는 단어장에 외울 것은 무엇 이든 모조리 적어 넣었다. 수학 공식, 과학 공식, 국사나 세계사에서 잘 외워지 지 않는 것들, 정치 경제에서의 복잡한 경제이론 등, 여하튼 외워야 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적어 넣었다. 심지어는 국사, 세계사책의 각 단원 맨 첫장에 있는 연도표까지 복사해 단어장에 붙여 두고 외웠고, 지도에서의 위 치 등이 외워지지 않으면 단어장에 직접지도까지 그려 외웠다. 그리고 언제나 단어장을 책상위에 올려 놓은채 수업에 임하였다. 선생님께 서 말하는 것 중 외워야 될 것들은 모두 단어장에 곧바로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단어장에 적어 놓은 것들은 틈틈이 외우고 다녔다. 이렇게 쉬는 시간 10분과 단어장을 활용해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학교에서 끝 낼 수 있었기 때문에 방과후에는 내가 정말 공부해야 될 것들을 공부할 수 있었 다. 위에서 소개한 방법 즉, 쉬는 시간과 단어장의 활용은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 하는 가장 이상적인 시간 활용 방법이다. 그러나 나의 이 방법이 모든 학생들 에게 유용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개인에 따라서는 나의 방법 이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 활용에 있어서 어 느 누구를 막론하고 명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정말로 분초를 아껴감 공부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잇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강한 의 지가 없다면 위의 두가지 방법도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한 강한 의지 가 없다면 위의 두 가지 방법도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 이 정말로 분초를 아껴감 공부를 해 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다 면 그 사람은 굳이 위의 두가지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공부를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를 열심해 해 보겠다는 의 지인 것이다. 또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내일은 없다' 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즉 오늘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하라는 뜻이다. '오늘은 친구가 와서, 오늘은 누구의 생일이니까, 오늘은 무 슨 날이니까...' 하는 핑계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 다. 예를 들어오늘 외우기로 한 영어 단어 50개를 내일 외우길 할 것이고, 내일 이 되면 또 다시 내일로 미루고... 결국 그런 사람은 며칠이 지나 도ㅗ 간신히 영어 단어 50개를 내일 외우기로 할 것이고, 내일이 되면 또 다시 내일로 미루고... 결국 그런 사람은 며칠이 지나도 간신히 영어 단어 50개를 외 우게 될까말까 할 것이다. 그런 이들이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었 듯이 내일 일을 모레로 미루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내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한 사람에게만이 진정한 내일이 있 는 것이다. 집중하라 요즈음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기계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실제 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만 하더라도 M.C 스퀘어 등의 집중력 향 상 기계를 가진 친구들이 5명이 넘었으니 전국적인 수요를 계산해 본다면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그런 제품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말 그대로 '집중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건 누구나 집중력의 중요성을 알고 있 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집중력은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절대적인 비중 을 차지하는 요인이다. 집중하지 않고 하는 3시간의 공부보다 집중해서 하는 공부 30분이 더 효과가 있다. 우선 집중을 하면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외 울 수 있으며 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집중을 하면 깊은 것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다. 예전의 학력고사는 암기식의 문제여서 암기만 하면 상당 히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수능은 다르다. 고차원의 이해를 요구하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어서 암기보다는 이해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암기를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전의 학력고사와 접근 방법이 다를 뿐 웬만한 것들은 다 외워야하고 거기에 부가적으로 이해까지 곁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수능의 어려움이 있다. 과학탐구나 사회탐구 영역, 그리고 수리탐구 영역I 등은 특히 깊은 이해를 요구하는 영역이라 생각한다. 이런 영역들을 공부함에 있어서 그냥 피상적인 이 해만을 하고 넘어간다면 다음에 그것과 유사한 문제가 나온다 하더 라도 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나 원리를 뼈속까지 이해하고 넘어간 다면 후에 아무리 문제가 변형되어 나온다 하더라도 다 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공부와 그렇지 않은 공부의 차이는 상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해를 한다는 것은 단순한 암기와는 다른 것이어서 하나의 원리나 공식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집중을 해서 그것에 빠져들어야 한다. 여기서 또 집 중력의 필요성은 강조된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집중력을 어떻게 기르느 냐고. 집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M.C스퀘어나 다른 기계를 사용하는 것은 한 가지 방편은 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근본적인 방법은 될 수 없 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집중력을 높이는 방법은 바로 '공부를 향한 의지 를 갖는 것'이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면 자연히 공부에 몰입할 수 있고, 바로 그런 것이 우리가 집중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뛰어난 집중력 향상 기계로도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의 집중력을 높일 수는 없을 것이 다. 공부를 향한 의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꿈을 생각하면 쉽게 생길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상황이 절박하다면, 그 절박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 한 한 방편으로 공부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과정에서 공부에의 의지가 생길 수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어려운 집안 사정이 자극제가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노래나 운동에 특기가 없는 나에게는 이런 환경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어려운 가정 환경은 공부를 향한 의지를 생기게 하 는 하나의 동기가 되어 주었다. 각자의 상황이 다른 만큼 자신에게 의지를 부 여하는 방법도 각자가 다를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부를 하고 싶게 만드는 동기를 갖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집중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에 재미도 느낄 수 있게 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종종 '공부가 재미있다'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것은 결코 괜한 말 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공부에 집중하다 보면 당연히 재미를 느끼게 된다 그 정 도까지 다다르면 재미가 있으니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하니 재미가 있어 계속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몰입해서 공부를 하다가 여태까지 는 잘 풀리지 않던 문제가 풀리고, 이해되지 않던 현상이 갑자기 이해가 갈 때, 그 깨달음의 즐거움을 무엇이라 형용할지... 기왕에 해야 되는 공 부라면, 그런 재미를 한껏 느끼며 공부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목표를 정해놓고서 달려라 할아버지와 손자가 눈이 내린 밭 중앙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저쪽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소나무까지 누가 똑바로 갈 수 있는지 시합해 볼까?" "그러죠." 시합은 시작되었고, 소나무까지 다다른 두 사람은 각자 눈 위에 새겨진 자신 의 발자국을 보았다. 손자의 발자국은 삐뚤삐뚤했고, 할아버지의 발자국은 거의 직선으로 나 있었다. 둘 다 똑바로 걸었는데도 결과는 달랐다. 차이는 한 가지 였다. 소나무까지 가는 동안 손자는 자신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만 보며 똑바 로 걸었고, 할아버지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걸었던 것이다. 이 우화는 거의 모든 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우화에서 발견할 수 있 는 교훈은 일상 생활 속에서 흔히 잊기 쉬운 것이 기 때문에 써본다. 이 이야기는 상당히 비유적이다 소나무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손자나 할아버지가 걸었던 그 발자국은 인생의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 지의 인생이 목표를 향하여 곧장 향했던 것이었다면, 손자의 인생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당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이야 기가 말해주듯 사람이 목표를 가지고 항상 그것을 바라보며 인생을 살아간다 면, 그 목표를 향해 곧장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1때 담임 선생님께서 이 런 말씀을 하셨다. "목표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사람은 향상 변하지 않는 자세를 갖고, 무슨 일이 있어도 꾸준한 자세로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목표가 있다면 잠시 탈선의 길 로 들어섰다 하더라도 다시 똑바른 길로 갈 수 있지만, 목표가 없 는 사람은 탈선의 길로 빠지기도 쉬울 뿐더러, 탈선의 길에서 다시 똑바른 길로 원상복귀하기도 힘들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목표를 부여하 는 것이 좋다. 그것이 일생의 큰 목표이든 작은 것이든 자신이 진정 동경하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작게는 원하는 대학에 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고, 크게는 자신의 꿈을 이룬 모습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런 모 습을 그리며 공부를 한다면 힘들 때 하나의 버팀목처럼 큰 힘이 되어 줄 것이 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주위에는 도망치듯이 현실을 외면하고 그저 하고 싶 은 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하는 것이 힘들어서 혹은 대 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워 보여서 현실을 외면하고 되 는대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 지금도 어딘가 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으리 라 본다. 나도 가끔 그런 적이 있었지만 돌이켜 볼수록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부딪히라'고 말하고 싶다 피하지 말고 맞부딪힌다면, 생각했었던 것보다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계속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표를 가슴에 품고 서 현실에 맞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제2장 과목별 공부 방법 (1) 언어 영역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과목이 언어 영역이다. 사회 탐구 영역이나 다 른 영역들은 한두 달 열심히 하면 실력이 향상되어 조금이라도 점수가 오르는 데, 언어 영역은 두세 달을 해도 전혀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대부분 학생들의 말이다. 그 리고 언어 영역에서는 특히 시간이 모자라서 10문제도 넘게 찍었다는 소리도 많이 들을 수 있다. 그럼 언어 영역을 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언어 영역을 공부하며 나름대로 느낀 점을 적어보겠다. 우선 언어 영역 을 잘하려면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언어 영역은 특이하게 도, 아니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두번 다시 같은 문제가 나을 수가 없다. 어쩌다가 같은 지문이 나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얼마든지 다르게 출제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를 외운다해서 점수가 오르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근본적 으로 언어 영역에서 평가하고자 하는 '근본적, 사실적 이해, 추리, 상상적 이 해, 비판적 이해, 논리적 이해' 등의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능력 들이 겨우 1-2개월 문제집을 푼다고 해서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평소에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이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으 면 자연히 독해력이 증가된다. 사실 언어 영역에서 나오는 문제들은 지문만 확 실히 이해한다면 눈감고도 풀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제들이다. 가끔 씩 반 친구들 중에서 다른 과목은 잘 못해도 유난히 언어 영역만 잘 보는 친구 들이 있다. 그런 친구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평소에 상당히 많은 독서를 한다 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서량과 언어 영역의 점수는 거의 비례한다.고 보 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집을 풀 때에도 나름대로의 방법이 필요하다. 언어 영역 문제집 은 매일 일정한 양을 꾸준히 푸는 것이 좋다. 나나 인득이 같은 경우에는 하루 에 대개 7-8개 정도의 지문을 풀었다. 매일 풀지 않으면 문제에 대 한 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지문을 풀 때도 막무가내로 풀지 말고 요령에 따라서 푸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내 경우는 우선 최대한 빨리 풀 수 있는 대로 빨리 푼 다음에 채점을 하고, 다시 지문을 읽어보며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 구조나 문단 사이의 관계를 자세히 인지하며 읽었고, 지 문을 완전히 분석하고 나면, 내가 틀린 문제는 왜 틀렸는지, 맞은 문제는 왜 맞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한 지문을 분석하고 나서, 다음 지문으로 넘어갔 다. 그리고 한 지문에 딸린 문제를 풀 때 시간이 6-7분이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 영역에 배정된 시간은 총 100분이고, 듣기 문제 6문항을 푸는 데 약 15분, 쓰기 문제 8문항이 20분 정도 걸린다면, 대개 언어 영 역의 문제에 지문이 10개 정도 들어 있으니까 65분 내로 10개의 지문을 풀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즉, 한 지문당 6-7분 정도의 시간이 배정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야만 시간이 모자라지 않고 제때에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집에서 문제를 풀 때에도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을 야 된다. 나는 지 문을 읽는 시간은 3-4분, 그 지문에 딸린 문제를 푸는 시간은 1분 정도로 해서 매 지문을 풀어 나갔다. 그래서 모의고사를 볼 때도 문제를 다 풀고 나면 10-20 분 정도가 남았다. 이것은 인득이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 문을 읽을 때 흐름을 파악하며 읽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글이라도 문단과 문단 사이, 혹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유기적 관계가 없는 글은 없다. 즉 글은 유기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지문을 읽을 때 그 점을 잘 파악해서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 다음에는 어떤 내용이 나을 것이며, 지금까지 읽어 온 내용은 어떻게 흐르고 있나?'라는 질문을 항상 자기 자신에게 던지기 바란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또 하나의 부분이 '시'이다. 시는 우선 많이 읽 는 것이 중요하다. 시험을 볼 때 아는 시가 나왔을 때와 모르는 시가 나왔을 때의 심적 부담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시를 공부하는 방법으로는 문제집을 풀며 나온 시들을 그때 그때 숙지하며 넘어가는 방법과 시만 나온 책들을 사서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 이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나나 인득이 경우 에는 시만 나온 책을 사서 전체적으로 훑어본 다음 문제를 풀며 자세한 시공부 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유명한 시인들의 경향이나 시적 특징을 외어두는 것이다. 그래야 시를 읽을 때 더 잘 이해가 된다. 모의고사나 실제로 수학능력 시험을 보는 자리에서 어떻게 문제를 푸느냐도 점수를 오르고 내리는데 큰 영 향을 미친다. 다 실전에 임했을 때 어려운 지문 이 나오면 그 지문은 그냥 내내 버려두고 건너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어려운 지문을 붙들고 계속 푼다면, 문제는 잘 풀리지 않고 시간은 시간대로 흘러 버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 같 은 문제가 나온다면 그 지문은 맨 마지막에 푸는 것이 좋다는 생 각이 든다. 나는 실제 수능에서 시 지문은 뒤로 제쳐 두었다. 맨 마지막에 풀었 다. 다른 지문들을 다 풀고 나면 35분 정도가 남아서 시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풀 수가 있었다. 시는 여러 번 읽어볼수록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 할 수가 있다. 단 한 번 읽어서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경우가 대부 분이다. 그만큼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언어 영역에서는 시간이 곧 점수이 니, 시간 안배를 잘해가며 시험을 쳐야겠다. 그리고 지문을 읽기 전에는 먼저 문제를 대충 훑어보고 지문을 읽어 가는 것 이 좀더 효율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 문제를 보지 않고 지문부터 본다면, 지문 보고 문제를 본 뒤 문제에서 요구하는 내용이 실려있는 부분을 다 시 지문에서 찾아야 하므로 이중으로 지문을 읽게 된다. 그만큼 시간낭비도 심 하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러나 문제를 보고서 지문을 읽는다면 문제에 맞추어 서 지문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예를 든다면 문제 중에 '위 지문의 구조는?', '다 음 내용 중지문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이라는 문제가 나온다면 지문을 읽어 나가며 문제가 요구한 문단과 문단 사이의 구조에 조금 더 신경쓰며 읽으 면, 문제가 요구하는 내용이 있는 부분을 주의해서 읽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를 풀 때 지문을 다시 보지 않고도 단숨에 풀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언어 영역이 매우 어려운 과목이지만, 어떤 아이들에 게는 점수 따는 밭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120점이라는 큰 점수 가 걸린 만큼 소흘히 할 수 없으니, 최선의 노력을 다해 언어 영역을 점수 따는 밭으로 만들기 바란다. (2) 수리탐구 영역I 수학능력 시험 과목들 중에서 수학만큼 나를 애먹인 과목은 없다. 또 수학만 큼 나의 공부 시간을 많이 빼앗은 과목도 없다. 수학은 매일 적어도 2-3시간, 많이 할 때는 4-5시간씩 공부했다. 그러나 나나 인득이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 고 있었다. 실전에서는 언제나 시간이 모자랐던 것이다. 사실 나에게는 시간만 충분하면 어떤 문제든지 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모의고 사를 보게 되면, 절반도 풀기 전에 답안지를 낼 시간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수학 문제를 빠르고도 정확히 풀기 위해서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 다. 그렇게 하다보니 드디어는 방법을 찾게 되었고, 여러 번 시행 착오를 겪은 나로서는 '어떻게 하면 수학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도 나 름대로 깨우치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것들 은 이렇다. 우선 수학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한다. 수학은 '응용 과목'이라는 생각 말 이다. 물론 수학은 확실히 응용 과목이다. 그러나 응용력의 뿌리는 결국 암기력 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가 갖가지 수학 공식을 외우는 것이다. 그러나 단 지 수학 공식만으로 실전 문제를 푸는 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 자 체를 외워야 한다. 그것이 마치 공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난 예전에 수학 과목은 많은 문제를 푼으로써 그 응용 능력을 길러야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수학 문제집을 닥치는 대로 풀어 대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런 생각없이 마구잡이 식으로 문제를 푸는 것은 뚜렷한 실력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또 너무 응용 능력만을 강조한 나머지 실전에 서는 시간이 모자라는 폐해가 있었다. 그래서 난 수학 공부방법을 180도 바꾸어야 했다. 즉 적은 수의 문제를 풀더 라도 그 문제 안에서 수학 공식이 어떻게 응용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 문제에서 하필 그 공식이 쓰였는지, 그 문제를 꼭 해답에 나와 있는 방법대로만 풀어야 할지까지도 면밀히 검토하는 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 문제를 확실히 이해함으 로써 한 번 본 문제는 아무리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더라도 눈감고 풀 수 있을 정도로 숙지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어떤 문제건 해답을 보지않고 풀려고 노력 했다. 문제 옆에 있는 힌트도 보지 않았다. 정 안 풀리는 것은 외워 두었다가 화장실에서나, 시장에 장보러 갈 때 상기시켜 풀곤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난 이도가 높다거나 문제가 예술적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따로 공책 을 만들어 모아 두고 틈틈이 암기하였다. 그렇게 1년 동안 모아 둔 문제가 약 520여 개나 되었다. 그렇게 해나가다 보니 수능 모의고사에서 수학 문제를 접하게 되면 전과는 다 르게 거의 모든 문제가 눈에 익어 보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어디선가 한 번씩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알 다시피 수학 문제는 낯이 익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푸는 것 사이에 큰 차 이가 있다. 낯익은 것은 이미 풀린 것이라 봐도 좋을 정도로 어떤 문제에 대해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수 리탐구 영역 I 부분에서 시간이 모자라 고생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여타의 학문도 그렇지만 수학만큼 기초의 건실함이 중요한 것도 드물다고 생각 된다. 수학은 다른 사회탐구 과목들처럼 결코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노력하였을 때 비로소 수학이란 학문의 윤곽을 볼 수 있 게 되는 것이다. 오직 끊임없는 노력만이 수학과 친해질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3) 수리탐구 영역 II 사회탐구 영역 사회탐구 영역은 노력의 여하에 따라 그 성과가 제일 빨리 나타나는 영역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개인마다 다르긴 하지만 아무리 노력을 많이 해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 점수가 존재한다. 그건 '사고력' 의 문제와 연관된다. 수능에서는 예전 학력고사처럼 그저 외우기만 하면, 시험 볼 때에는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그런 유형의 문제는 나오지 않는다. 즉 모든 기초 상식들을 외웠다하더라도 한 면의 반이나 되는 문제를 읽어야 하고 또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추리해야만 답을 골라 낼 수 있다. 그렇 다면 무엇하러 시간을 낭비해가며 그 많은 것들 -지형, 연도, 개념 등-을 외워 야 하느냐는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기초 상식들이 없다면, 문제를 접하고서 그 문제를 추리하거나 생각하고 사고하는 과정 자체 를 할 수 없게 된다. 많은 상식들을 외우면 외울수록 문제에 접근하는 게 쉬워 진다. 그만큼 답을 찾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나 아무리 지식을 많이 익힌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사고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점수가 오르는 데에 한계는 생기게 마련이다. 모든 수능 시험의 영역에 공통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사고력' 이므로, 이것을 키우기 위한 훈련은 아주 중요하다. '사고력'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자세에서 길러질 수 있 다고 본다. 무엇을 접하든 'Why'란 질문을 던지며 파고 들어가기 바란다. 간단 히 예를 들면 십자군 원정은 왜 시작되었으며, 왜 실학이 나타났고, 왜 명나라가 강남을 근거지로 왕조를 부흥시켰나? 왜 묘청은 서경천도 운동을 전개하였고, 왜 인플레이션시에는 긴축재정을 해야 되나? 등등. 사회탐구 영역 을 공부하면서 'Why'란 질문을 수도 없이 던질 수 있으며, 그런 의문을 자신이 직접 교과서와 참고서를 보며 해결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사고력'은 확장되며, 자신의 '한계 점수'는 올라가게 되는 것이 다. 이제 포괄적인 방법은 이만 말하고 좀더 세부적인 나의 공부방법을 말해 보 겠다. 우선 국사나 세계사 등의 역사 과목을 공부할 때에는 교과 내용을 여러 번 읽어 숙지했다. 그래서 언제라도 세계사나 국사에 대하여 말해 보라고 한다면 시대순으로 인류의 기원에서 신석기 혁명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 까지의 주요 내용을 일목 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공부했다. 이건 자기 머리 속에 시대순으로 잘 정리된 지식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의 체계 를 갖기 위해서는 연도를 외우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연도 외에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자신이 스스로 찾아서 연도를 알 아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너무 어렵다 느껴지면 세기 단위로라도 외우기 바란 다. 1580년대의 일이라면 16세기 말, 510년대의 일이라면 6세기 초, 이 정도라도 외워 두면 세계사나 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 다음에는 각 과목과의 연계를 생각하며 공부했다. 세계사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사건이 국사에 많이 존재하며, 또한 국내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 을 때 세계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도 파악할 수 있어야겠 다. 즉 수직적인 세계사와 국사의 이해에서 벗어나 수평적으로 동시대의 각국 의 일들도 알 수 있어야 한다. 각 시대 상황에 따라 나오게 된 많은 사상들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그저 윤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그런 사상들이 나을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해 주는 일들과 연관지어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사진이나 그래프 등 교과서에 나온 모든 비문자 정보들은 당연히 주목하여 보아야 한다. 그렇게 교과서를 읽으며 내용을 거의 다 익힌 후에는 문제집을 집중적으로 풀 었다. 문제를 풀기 전에 간단한 내용 요약을 보며 내가 외운 것들을 상기시켜 복습했고, 그 다음에 문제로 들어가서 쌓았던 지식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또 남이 출제한 문제를 보면서 내가 놓쳤던 부분이나 한 사건을 다른 면에서 파악할 수도 있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사실 혼자만의 생각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문제집을 많이 푸 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탐구 영역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바로 나오는 영역이니만큼 열심히 노력해서 노력의 기쁨을 맛보았으면 한다. 과학탐구 영역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 자연 현상 사이의 상호 관계나 원인 등을 연구하여 그 일반적인 법칙을 탐구하려는 과학' 위의 진술은 국어 사전(동아 출판사, 새국어사전)에서 '자연 과학'에 대해 발췌 한 것이다. 우리는 위의 진술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일반적인 법칙 을 탐구하려는 과학' 이라는 부분에 주목하자. 그렇다. 과학이 란 것은(그 중에서도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자연 과학임을 밝혀 둔다) 불규칙하 게 보이는 우리 주변의 현상들이 결국은 어떤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밝혀내는 학문이다. 우리들이 고등학교 과정에서 배운 것들 은 그런 법칙들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그런 기본적인 법칙을 배워 실제 우리 주변의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 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는 데 맹점이 있다고 본다. 수능시험의 평가 요 소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배운 것들의 현 실 세계에 대한 적응 능력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것은 과학 이라는 학문의 테두리 안에서 시험을 위하여 변해 온 문제를 풀 기 위한 기술이 아니었나 한다. 그러나 학력고사가 수능시험으로 바뀌면서 특히 과학 부분에서는 현실 적응 능력의 평가적 성격이 짙어지고 있음 을 알 수 있 다. 그러므로 과학탐구를 공부할 때는 하나의 공식을 외우더라 도 그 공식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또 그 공식이 어떤 곳에서 활 용되는지 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능시험에 문제화 되어 나오는 것들은 어떤 실험에 대한 결과나 그 과정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실험 과정에 그 비중이 더 크다. 생물을 예로 들어보 자. 어떤 혼합 물질에서 녹말의 존재 여부를 알기 위해서 요오드 용액을 떨어뜨려 그 결과를 알아보는 실험이 있다고 하자. 만약 이 실험으로 문제를 낸다면 그 문제의 유형은 두 가지로 갈라질 것이다. 실험의 결과에 대 해 묻는 것과 과정에 대해 묻는 것으로 말이다. 실험의 결과에 대해 서 묻는다면 '요오드 용액을 이 혼합물에 떨어뜨렸을 때 나타나는 색깔은?'이라 는 질문이 나을 수 있겠고, 과정에 대해서 묻는다면 '이 실험에서 녹말 검출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물질은?', '실험에서 요오드 용액을 사용 하는 것은 어떤 물질의 존재를 알기 위함인가?' 등의 질문이 나을 수 있을 것 이다. 이 예시는 간단한 실험에, 간단한 질문이므로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수능에서는 위와 같이 간단한 실험이 나오지는 않 지만 그 근본적인 유형은 위와 같이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수능시험의 문제가 실험에서 나온다고 해서 모든 실험은 외울 수는 없는 것이고, 또 외울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실험이란 얼마든지 다른 형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 다. 따라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실험들의 결과만을 외우는 것이다. 위의 실험을 잠시 빌리면 '녹말은 요오드 용액과 반응하면 보라색을 띤다'라는 결과만을 외우는 것이다. 우리들이 그 실험들일 결과를 알고 있고 어 떤 실험이든지 정확히 읽고 파악할 수 있다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는 간단히 풀 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학탐구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울 것들은 외 우고, 어떤 낯선 실험이라도 그 일련의 과정을 보고서 그 실험의 목적과 그 모 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 외국어 영역(영어) 대학수학능력 시험 과목 중 어느 과목이 가장 쉬웠느냐고 물으면 나는 단연 영어를 꼽을 것이다. 영어는 그만큼 나에게 친숙하고도 쉽게 느껴지는 과목이 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친구들이나 후배들이 나에게 영어에 대해 자주 물어보는 것이 있다. 수능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영어 문법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영어 문법 공부는 필요하다. 아니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처럼 긴 문장을 빨리 읽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린 시험 체제 하에서는 예전처럼 자세한 문법은 필요치 않다. 오직 기본적인 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예를 들면 to부정사, 관계대명사, 문장의 형식 같은 것 말이다. 본래 우리들이 영어 문법을 배우는 이유는 우리의 모국어와 체계가 다른 영어 를 배우는 데 있어 그 기본적인 체계를 알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 언어를 더 욱 빨리 익히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법 공부에 대해 너무 강한 거부감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문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것이 문장의 형식이 아닐까한다. 1형 식에서 5형식까지 외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2분 안에도 모조리 외울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의 형식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영어를 거의 다 안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문장이라 고 해봤자 결국 1형식-5형식 중의 하나이므로 각 형식의 해석 어순이 어떻게 되어있나 알고 있고, 그 문장에 나온 단어의 뜻만 알면, 그 문장 은 해석이 되는 것이다. 물론 문장이 도치되고, 관계대명사와 to부정사에 의해 복잡하게 얽혀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은 문장도 많이 있지만, 그 문장도 잘 뜯어 보면 결국 1형식-5형식 중의 하나 이다. 또 그렇게 손도 못 댈 정도로 어려운 문장은 실제 수능에서는 좀처럼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나 온다 하더라도 전체 55문제 중에서 2-3 문장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 정도는 해석을 못한다 하더라도 답을 맞추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실 제로 수능에서는 지문의 50% 정도만 이해해도 풀 수 있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지문을 보기 전에 먼저 지문에 딸린 문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읽지 않고 곧바로 지문으로 들어가면 해석을 해나가 는 도중 앞의 내용을 잊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문제를 풀기 위해서 지문을 다시 한 번 보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를 먼저 읽고 지문을 보면, 이미 그 지문에서 알아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읽기 때문에 지문을 두 번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 따위는 겪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 정말 중요한 것은 어휘력이다. 많은 친구들이 영어 단어를 외우는 방법 중의 하나가 '능률 vocabulary'나 그와 비슷한 책들을 사서 외우는 것이었다. 나도 얼마 동안 그런 방법을 써 보았다. 그러나 별 효과를 보 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방법에 회의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어를 외우는 것은 문장을 해석하기 위한 것인데, 그런 식으로 단어를 외우는 것은 단어를 위한 단어 외우기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 어는 독해 집을 풀다가 모르는 것이 나오면 사전을 찾아 그 단어를 조사해 단어 장에 적은 후에 외우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단어를 외울 때마다 어느 상황에서 그 단어가 쓰였는가가 생각나 그냥 막무가내로 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잘 외워진다. 앞에서 말한 영어의 기본적인 문법, 그 중에서도 문 장의 형식과 단어, 그 두 가지가 영어 독해의 열쇠라 여겨진다. 제4편 아버지 이야기 제1장 과외없이 공부한 쌍둥이의 12년 + a 교육은 이렇게 나는 쌍둥이를 학원에 보낸 적도 없고, 과외 공부를 시킨 적도 없다. 미취학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과외 공부 없이 내 방식대로 아이들의 교육에 정성을 기울였을 뿐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새삼 새삼 느끼는 것은 자식들이 세상을 헤 쳐 나가는 데 있어 부모가 그들의 인생에 뛰어들어 직접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훌륭한 조력자가 될 수는 있다 는 걸 알았다. 이전에도 그래왔듯이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그 애들의 옆 에서 애정을 갖고 지켜 봐주는 조력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인생의 선배로서 그 애들이 올곧게 자라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 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잘 따라 주었다. 엄마도 없는 가정, 궁핍하고 암울한 생 활 속에서도 예민한 청소년 시기를 탈선하는 일없이 잘 통과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낸 아이들이 아버지로서는 대견스러울 뿐이다. 힘든 한 고비를 넘기고 이 제 새로운 세상의 바다로 뛰어드는 나의 아들들. 아버지로서 그 애들의 앞날 에 이제 희망찬 일들이 줄을 잇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다. 그러나 이전보다 더 혹독한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고 더 거친 바람과 더 거센 파도가 그 애들 앞에 다가올 수도 있음을 안다. 나의 살아온 날들만 봐도 인생은 결코 한 가닥의 실로 엮이는 게 아니다. 순 풍에 돛단 듯이 풀려가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뜻하지 않은 고난들이 형벌처럼 가해져 한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기도 한다. 살아있기에 어떤 일도 일어 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걸 어떻게 헤쳐나가는지가 문제이다. 끊임없는 노력 으로 헤쳐나갈 것인지,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것인지... 마디마디 굴곡진 나의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어떤 상황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삶의 태도' 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일관되게 가르치려고 애써왔던 것이 바로 '노력하는 자세'였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보다 노력하는 백치가 낫다'는 말처럼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발전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얼마나 성실하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각 자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노력 여하에 따라 누구나 우등생 및 수재가 될 수 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연습없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비어있는 엄마의 자리까지 메워야 했기에 아이 들에겐 늘상 부족함이 많았음을 안다. 그럼에도 내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아 이들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해왔던 일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혹여 비슷한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게 미력하나마 작은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실어서. 1. 미취학 교육 4-5살 때 한글을 직접 가르친다 내가 비로소 아버지가 되던 날, 나는 하나도 아니고 동시에 들을 얻는 축복 을 받았다. 쌍둥이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그 아이들이 1살이 되고 걸음마를 하 던 일과 오물오물한 입으로 '나'라는 말을 배우며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 동하던 일, 그러다가 어느새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태도가 생겨서 갑자기 의젓 해지던 일 등 그 일련의 과정들을 보는 일은 더없이 신비롭고 행복한 일이었 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했겠지만 사랑스런 그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그 소중한 존재들을 잘 기르고 싶었다. 아이들이 4살이 될 때까지는 자유스럽게 자라도록 두었다. 너무 어릴 적부터 공부하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해서는 역효과가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4살쯤 되니 아이들은 '왜?'라는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고, 지적인 흥미가 눈에 띄 게 자라났다. 바로 그때 아이들의 지적 흥미를 키워주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고 본다. 그래서 나는 쌍둥이에게 4살 때부터 조금씩 내가 직접 한글을 가르쳤고, 영어 알파벳과 발음 부호까지 확실하게 익히게 했다. 쌍둥이 는 신이 나서 배웠다. 길거리의 간판들을 가리키며 글자들을 또박또박 읽고는 좋아라 손뼉을 치곤 했다. 틀에 가둬 가르치는 게 아니다 보니 학습이 일종의 놀이가 되었던 것이다. 쌍둥이는 커가면서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자기 주변의 세계 와도 잘 조화하는 듯 보여 어떤 때는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다 자랐다는 느 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 님 등 어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시기이다. 할 수만 있다면 유치원에서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 것보다는 부모님이 직접 한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 마음에는 은연중 에 부모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싹트게 되고 어릴 적에 새겨진 이런 존경심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워지지 않는다. 부모님의 존재가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글을 가르쳐 주신 고마운 분들로서도 남는 것이다. 주위에서 보면 지레 우리 아이는 IQ가 낮아서 뭘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 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그런 이들의 대부분은 시간이 없어서, 사는 게 힘들어서 라는 등의 이유를 달며 자녀에 대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한다. 그러나 지능 관련 연구에서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L. M. 터먼 박사의 통계는 보통 사람의 99%는 노력하 면 누구나 우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평소 그런 생각을 해왔던 나는 그 통계를 보고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 통계에서 보면 보통 이상의 지능 지수(IQ)를 가진 사람의 분포만 80%가 넘는다. 그리고 경계선급 미만으로 분류된 정신박약 이하는 겨우 1%에 불과하 다. 그러니 정신박약으로 분류된 1%에 속하는 사람이 아닌 99%의 사람은 노력하면 누구나 우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듭 생각하지만 아이들은 어른을 보며 배우고 자란다. 그러니 교육이 절대 적으로 필요한 미취학기에 부모님들이 최선의 정성과 노력으로 자녀를 대한다 면, 누구나 우수한 자녀들로 자랄 수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취학 전에 반드시 위인전을 읽힌다 지적인 능력이 싹트는 4살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께 의존도가 가장 높은 초 등학교 2학년 때까지의 아이들은 아직 파종하지 않은 밭과 같아서, 이 곳에 맨 처음 무엇을 심느냐가 중요하다. 이 맑디맑은 마음밭에 위인들의 고귀하고 위대 한 뜻을 심어주는 일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우선 순위로 해주어야 할 일 아 닐까? 한국 위인이나 세계 위인이나 위인들의 행동을 살펴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 분야의 으뜸이 되기 위해 굳은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해 배우고 힘써 일하며 쏟은 노력은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음 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이 예절바르고, 지혜로우며, 믿음직스럽고, 애국심이 강하면서 효성이 지극하고, 친구나 형제 등과 우애가 돈독했다는 점이다. 그런 데 그건 타고난 기질이라기보다는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끊 임없이 어질고 의로운 성품을 갈고 닦은 결과라는 점에서 다시금 그들이 위인임 을 깨닫게 된다. 나는 쌍둥이가 한글을 확실히 깨우치고 난 후에 바로 한국 위인전과 세계 위 인전을 읽게끔 했다. 1차적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위인 전집을 모두 읽 게 했고, 한 번 읽은 것으로 끝나 버리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 기에 , 같은 책들을 초등학교 1,2학년 때도 되풀이하여 읽혔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어린 마음 밭에 이러한 위인들의 발자취가 자리잡고 싹이 트는 걸 상상하면, 생각만으로도 벅찼다. 쌍둥이가 이러한 위인들의 발자취를 따 르다 보면 그런 품성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슴에 큰 꿈을 품고서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하며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어느 곳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 라고 믿었다. 주위에서 간혹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 르쳐야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서슴지 않고 위인전을 읽히라고 권한 다. 만일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국 위인전과 세계 위인전을 모두 읽히지 못했 다면, 초등학교 1,2학년 동안 반드시 읽게 하라고. 그래서 아이들이 위인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본받도록 도우라고. 그러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위 인의 자질을 다듬어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공부를 못한다고,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다고 습관적으로 속어까지 섞어가며 천 번, 만 번 꾸짖고 매질하는 것보다 어릴 때 위인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인 교육이 될 것이다. 역사를 빛내고,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어 온 사람들의 위대한 발자취 를 읽고, 듣고, 배우게 하는 것이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는 지름길인 것이 다. 거기에 부모가 자녀와 함께 위인전을 반복해서 읽고 배운다면, 그것이야말 로 분명 산교 육이 되리라 생각한다. 2. 초중고 교육 꿈을 기필코 실현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심어준다.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하다. 공부 역시 꾸준한 반복과 연습을 필요로 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도 역시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반드시 목표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러니 모든 일에 있어 첫발 은 확고한 의지를 갖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의지를 갖고 행하려면 생활 속에서 실천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그래 서 나는 쌍둥이에게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소위 스케줄 핸드북'을 활용하게 했다. 평생 계획과 연, 월, 주간 계획 및 일일 계획을 철저히 세워 반 드시 실천하도록 말이다. 특히 일일 공부 스케줄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24 시간의 세부 계획을 세우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 작성한 '스케줄 핸드북'에 따라 즐거운 마음으로 반드시 실천 하라고 일렀다. 언제나 그날 하루 계획을 확실하게 실천한다면 평생을 똑같은 방법으로 실천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곧 꿈을 실현시키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 기에. 내 아이들의 '스케줄 핸드북'에 세워진 꿈이 위대한 정치가라면 반드시 역사 에 길이 빛날 정치가가 될 것이고, 검사가 꿈이라면 반드시 정의로운 검사가 될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게 의지를 갖고 성실하게 노력해 나가다보 면, 그 동안 자신을 한없이 고달프게 했던 일은 '스케줄 핸드북'에 입맞춤하면서 기뻐할 날이 것을 믿는다. 쌍둥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실천의 과정이 비록 힘들고 어렸더라 도 참고 견디면서 반드시 지켜나가도록 격려하는 일이었다. 1초의 시간이라도 소홀히 여기지 말라고, 다시 올 수없는 오늘 이 순간은 소중하고도 또 소중한 시간임을 명심하라고 말이다. 그런 자세를 갖게 된다면, 그들이 어느 때,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강인한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해 성실한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런 삶 의 자세였다. 끈기있게 예습, 복습을 반복하게 한다. 나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수학능력 시험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기초부터 모든 교과목을 확실하게 익히지 않고서 나 중에 우수한 성적을 올리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다. 그래서 평소에 노력하고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주려고 했다. 공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말이다. 익숙해진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습에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해야했다. 그러려면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선생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일이 중요했다. 존 경심을 갖으면 귀기울여 듣는 일이나 흥미를 유지하는 일이 더 쉽기 때문이 다. 그리고 예습과 복습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강조했다. 짧은 시간일지라 도 매일 일정한 시간을 들여 철저히 살피는 것이 곧 실력이 되는 것이기에. 평소에 인내를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해나간다면 누구나 우수해질 수 있으니 자신들이 훌륭한 인물이 될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배움의 길을 밝히는 일에 최선을 새학기가 되면 새로운 교과목 참고서를 선택하는 일로 나는 아이들 못지 않 게 바빴다. 교과 공부에 도움이 되는 우량 참고서 및 문제집을 아이들과 함께 가서 직접 구입했다. 이렇게 하니 아이들이 어떤 교과목들을 배 우고 있는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뿐더러 전과목 을 다 구입할 수 없는 형편에서 신중하게 선택하게 되는 등 구체적인 관심을 갖게 되고, 아이들은 그 관심을 피부로 느끼게 되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또 보다 자세한 지식을 필요로 할 때 답답하지 않도록 세계 대백과사전을 마 련해 주었다. 사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때가 잦은 궁핍한 생활 탓에 아이들에 게 어느 것 하나 풍족하게 채워주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배움과 관련된 것에 있어서는 내 최선을 다해 마련해주었다. 그것들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가는 데 등불이 되고 힘이 되어줄 것들이기에 내가 쏟을 수 있는 정성을 다하고 싶었다. TV 시청, 어떤 습관을 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스크린 세대인 아이들에게 생활에서 TV시청은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활에서 이 부분이야말로 많은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에 몰두하다 보면 공부하기가 싫어지고, 그 프로그램 방영 시간만 되면 잡념이 생겨 집중력을 잃게 된다. 따 라서 학생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이 아니면 시청하지 않는 습관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또 당연히 공부방에는TV수상기가 없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습관은 모든 걸 지배하기 때문이다. 나는 쌍둥이에게 초등학교 때는 어린이 프로그램, 중고등학교 때는 종합 뉴 스와 학생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만 선택하여 시청하게 했다. 고등학교 때는 뉴스 시간대에 식사를 하며 시청하고, 간략한 토론을 곁들여 참으로 알차게 TV 를 시청했다. 애초부터 그런 방침을 정해두고 오랜시간 실천하다 보니 아이들도 익숙해져 굳이 다른 프로그램을 보려고 한다거나 그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었다. 바른 원칙을 세워 두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독서 습관이 중요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해야 할 교과목이 늘어나 아이들에겐 교과 공부만도 넘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쌍둥이에게 중고등학교 때 세계 문학 및 한국 고전, 한국 현대 소설, 한국 현대 희곡, 명시 등을 모두 읽으라고 권했다. 그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으나 쌍둥이는 틈틈이 문학 서적들을 읽 었다. 문학 작품을 탐독하다보면 확실히 정서가 풍부해져 폭넓은 인생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고,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을 발견할 수도 있다. 또한 문학 감상 능력과 종합적 사고 능력이 길러져 폭넓은 학문을 하는 데도 큰 도 움이 된다. 막상 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고득점을 하고도 논술 시험에 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해 불합격되는 학생들을 보고 나니 이게 참 중요한 일 임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독서 습관은 하루 이틀에 형성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독서의 중요성을 알고, 무엇보다도 좋아할 수 있도록 습관을 심어주는 것 이 필요한데, 그것은 어릴 때부터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는 부모들도 아이들과 함께 독서하는 습관을 들이고, 세계 문학 및 한국 문학 작품을 모두 반복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들이 선행될 때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를 보고 배울 것이고, 또 그것이 바탕이 되어 자녀 들을 깊고, 넓은 세계 속에서 만나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평생 지도교수인 부모님 부모 연습? 세상엔 결코 연습해 볼 수 없이 바로 실전에 들어가야 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도 그렇다. '나는 이렇게 해야지, 이 런 모습이 보기 좋구나'라고 생각은 많이 할 수 있지만 막상 아버지의 자 리에 서서는 온통 당황스럽고 난 감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아이들이 자라 고등교육을 받으면서도 그렇다. 영어며 수학에 언어 영역, 정치 경제, 물리 등 복잡한 교과목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 자녀 지 도를 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적잖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 된 생각이다. 이런 교과목들은 자녀들이 알려고 노력만 한다면 선생님과 참고서를 통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들이고, 만점을 맞을 수도 있는 문제들이다. 부모의 자리에서 해야할 일은 바로 아이들이 위인들의 행적을 본받고 실천 하여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확신한 다.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평생 지도교수의 자리에 서서 가르칠 최대의 과 제이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평소 부모가 먼저 똑바르게 살고,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 일이자 값진 인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성 실히 가르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몸으로 보여주는 부모가 자식들의 평생 지도교수로 서 있는 가정, 그런 가정의 자녀라면 어느 누구든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라는 진리를 가슴으로 받아 안을 수 있을 것 이다. 내 스크랩북에는 이런 부모의 일화들이 몇 있는데, 그 중 인상깊은 일화가 있다. 일본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시미즈 히로야씨의 이야기이다. 그는 161cm의 키에 70kg의 몸무게로 땅꼬마란 별명이 붙은 데다 천식까지 앓아 원정 경기 때는 공기 흡입기를 지참할 정도로 건강에도 문제가 있었던 악 조건의 선수였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의 아버지의 태도였다. "너는 키가 작고, 건강이 안 좋으니까 남보다 훨씬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1위를 목표로 삼아라!" 시미즈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런 말을 좌우명으로 심어 주며, 그에 걸맞는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여름에는 롤러스케이트를 신켜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켰고, 짧은 다리로도 긴 보폭의 스케이팅을 구사할 수 있게 하려고 어릴 때부터 일본 나막신인 게다만 신켰다고 한다. 이런 일들은 시미즈에게 뼈 를 깎는 노력을 요했다. 4살 때부터 이런 훈련을 견뎌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나치리만큼 강한 아버지의 집념과 정성이었다. 그 러나 아들의 성공을 위 한 그의 진정 어린 노력들은 아들 스스로 고된 훈 련을 견디도록 했으며, 결국 그를 세계 최고로 만들었다. 시미즈 선수는 1994-1995년 월드컵 시리즈에서 무려 6차례나 500m 1위를 차지했고, 19%년에는 35초 39의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1998년 나 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돌아가신 나의 아버님이 오늘의 나를 만들 어 주셨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아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최선을 다한 위대한 지도교수 아버지의 은혜에 보답하는 기쁨의 결정체였던 것이 다. 내 가슴에 새겨진 또 하나의 훌륭한 부모의 모범에는 헬렌켈러의 부모가 있다. 삼중고 불구자 자식의 부모라는 자리는 절망의 옆자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병을 고쳐보려 사방으로 애써봐도 허사였 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는 찰스 디킨즈가 쓴 '아메리카 기행'I 이라는 책에서 한가닥 희망의 줄기를 찾아낸다. 그 책에는 장님이자 벙어 리인 한 소녀가 하우 박사에 의해 훌륭한 교육을 받아 글도 읽고 쓸 줄 알 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하우 박사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그레엄 벨 박 사를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 맹아 학원을 돕고 있던 그 박사의 소개로 이 학원 출신인 설리번 선생을 가정교사로 맞게 되었고, 알다시피 그녀를 통 해 헬렌켈러의 인생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후 헬렌켈러는 하버드 대학에 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연이어 여러 대학에서 명 예박사 학위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 프랑스 훈장과 미국의 자유 훈 장 등을 수여했고, 세계 각국을 누비면서 평화운동으로 사회 봉사 활동을 했으며, 세계의 200만 맹인에게 큰 용기를 불러 일으켜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이는 물론 헬렌켈러 자신의 피땀어린 노력의 결과이고, 인간의 숭고한 정 신력의 승리이자, 배움의 길에서 생긴 세계적인 기적이다. 그러나 삼중고의 불구자 자식임에도 절망하지 않고 훌륭하게 가르쳐 보겠다는 강인한 집념 으로 노력한 그녀의 부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얘기는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 곧 자식 사랑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참으로 삶의 빛나는 가치를 맛보게 해주 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 어디에도 부모만큼 100% + a의 정성으로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훌륭한 평생 지도교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이들을 보며, 나는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서 왜 망설이고 있는가를 자문하게 된다. 진실된 애정과 성실한 노 력의 자세를 갖고 있는 부모라면 지식의 정도를 떠나서 그 누구라도 충분 히 훌륭한 지도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 3. 가훈과 생활신조, 소망 등을 부모님이 정하고 자녀와 함께 실천하도 록 한다. 옥상 우리집 4평 단칸방엘 들어서면, 키 작은 방문 옆으로 세개의 코팅 된 펜글씨가 나란히 붙어 있다. '사람다운사람이 되자' ,우리 집 가훈이다.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애로서 모든 일에 낙관적이고 능동적이며 합리 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극기하며 나 자신을 생각하고 사 랑하듯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자', 우리 식구, 나와 두 쌍 둥이의 생활 신조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 나의 그리고 이젠 두 아들도 함 께 할 오랜 소망이다. 한 집안의 식구들이 함께 지켜나갈 것이 있다는 것은 서로를 묶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들을 쌍둥이가 미처 태어나기도 전 에 세워두었기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보고 자랐다. 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자'를 가훈으로 삼고자 생각했던 것은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 가필드의 일화를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가필드가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장차 어 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어 본 일이 있었다. 어린이들은 '대통령이 되 겠다'는 것을 필두로 제각각 '위대한 학자가 되겠다'느니, '세계 제일의 갑 부가 되겠다' 혹은 훌륭한 정치가, 용맹한 장군, 정의로운 법관, 의사, 선생 님, 변호사, 성악가, 피아니스트, 배우, 모델, 예술가가 되겠다는 등 각자의 포부를 말했다. 그런데 소년 가필드만은 뜻밖의 대답을 했다. '사람다운 사 람이 되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세상에 명성을 떨친다고 해도 그 됨됨이가 사람답지 않다면 개나 돼지 같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큰 소원이다"라고 했다. 어린 소년의 말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일화였고, 나 역시 그것을 내 삶의 근본으로 삼 고자 가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인(어질고), 의(의롭고), 예(예절 바르 고), 지(지혜롭고), 신(믿음 있고), 충(나라에 충성하고), 효(부모에 효도하 고), 애(형제나 친구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를 바탕으로 극기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었다. 물론 생활 속에서 완벽할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옳은 가치 들을 신조로 삼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또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듯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하 며 진, 선, 미, 성의 가치를 추구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 가난한 백 성 하나 없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나의 소망이며 쌍둥 이의 소망이다. 이제 성인이 되어 가는 두 아들과 나, 우리 세 사람은 앞으 로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4. 가족회의 나는 인식, 인득 쌍둥이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매일 30분 정도의 토론을 해오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등에 대해서 내가 설명을 하면 인식, 인득이도 나름대로의 의견을 발표한다. 앞으로의 진로문제와 실천사항, 공 부하는 방법과 현재의 실력 수준 등에 대하여 논의하고 지금까지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한다. 우리의 소박한 가족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아버 지와 아들 사이를 떠나 동아리 친구처럼 마음을 열고 대화한다. 경우에 따 라 서는 서로를 칭찬하기도 하며, 감동 받을 만한 화제로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독재와 억압이 아닌 민주적이고 사랑이 가득찬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 족 구성원간에 마음을 활짝 열고 하는 대화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족의 행복뿐만이 아니고 더 나아가 기업이나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나의 아들들이 세상에 보탬이 되는 큰일을 할 수 있기를 기도 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아이들에게 민주적인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으로 아이들의 바탕을 만 들어 주는 일 그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기에. 5. 모범을 보이자 나에겐 아주 소중한 보물이 하나 있다.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의미하는 세 개의 원 안에 새겨진 '충'자 배지가 그것이다. 그건 스무 살에 내손으로 만든 배지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해 충'자를 배지 로 만들어 지금까지 32년간을 늘 가슴에 달고 다렸다. 여유가 있을 때나, 사업에 실패했을 때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변함없이 내 가슴에는 '충'자 배지가 빛나고 있었다. 쌍둥이는 내가 32년 동안 가슴에 달고 다닌 '충'자 배지를 우리 나라 전 국토 약300억 평의 땅값에 해당하는 1,638조 원을 준다해도 팔 수 없다고 했다. 명예나 권력 그리고 재산마저도 없는 아버지이지만 중심을 잃지 않 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다니는 나의 생활과 행동에서 인식, 인득 쌍둥이는 많은 것을 느꼈던 모양이다. 무엇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자녀 에게 교훈이 될 모습을 보여주는 일, 그것이 바로 부모의 몫이 아닐까 싶 다. 나는 쌍둥이를 키우면서 뺨 한 대를 때리지 않았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 다고 강압적인 언행을 보이고, 사랑의 매라는 허울좋은 폭력으로 자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은 부모 자식간에 허물기 힘든 장벽을 쌓을 뿐이라 고 생각한다. 부모가 그러한 것처럼 자녀들의 행동에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이고,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는 것이기에 우선적으로 그들을 존중해 주었다. 잘못된 것이 있을 땐 강압이 아니라 모범을 보일 때 그들 스스로가 깨닫고 변한다는 것을 나는 내 아들들을 보고 배웠다. "물은 그릇의 모양에 따라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한 것이요, 허공은 병 의 크기에 따라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율곡 이이의 말이다. 역사에 길이 남을 성현이자 위대한 정치가이며, 높은 벼슬까지 지낸 그는 죽을 때 겨우 부시(부싯돌을 쳐서 불똥이 일어나게 하 는 쇳조각)하나를 그의 전 재산으로 남겼다. 1리고 수의 한 벌도 없어 남의 것을 빌려야 했다. 그의 이런 덕망과 인격 이 형성된 데에는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역할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학문 과 예술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그녀는 착한 아내요, 어진 어머니이자 어 버이께 극진히 효도하는 사람이었다. 뭇여성들의 거울로 칭송되는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가 그 자식에게 모범이 되었기에 자식이 위대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그런 신사임당에게는 역시 훌륭한 부모님이 있었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성격이 곧고 깨끗하여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소신 대로 해내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신사임당의 어 머니는 하늘에 사무치는 정성으로 남편을 구했다. 참되고 바르게 살아 온 신사임당 아버지와 정성어린 신사임당 어머니의 모 범된 삶이 신사임당에게 이어졌고, 신사임당의 위대한 삶이 율곡에게 큰 교훈이 되었으며, 이들의 삶의 태도는 우리들이 아름다운 삶을 엮어 가는 데 나침반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정의 울타리에서 자식에게 모범이 된 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바로 살아있는 자녀 교육인 것이다. 6. 책상 앞에 붙은 낙서 쪽지 인식이와 인득이, 쌍둥이의 책상 앞 벽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힌 쪽 지가 붙어 있다. <나의 1차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실천 사항 > 1. 가훈과 생활신조를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마음에 새기고, 실 천한다. 2. 잠은 하루 5시간, 낮잠은 30분 이상 자지 않는다. 3. 공부할 때 졸리면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즉시 일어나 하루에 백 번이라 도 세수를 하고, 맨손 체조 등으로 정신을 맑게 한 후 다시 공부한다. 4.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목표는 으뜸으로 반드시 성취한다. 웃음거리가 될 실천 사항 같지만 쌍둥이가 학교 생활 12년 동안 가장실천 하기 힘들었던 것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졸음을 참는 일이었 다. 쌍둥이는 아침에 내가 깨우지 않으면, 세 개나 되는 자명종이 일제히 합창을 하며 요란하게 울어대도 그 소리를 오히려 자장가 삼아 잠을 자는 녀석들이다. 아마 24시간도 능히 계속 잘 수 있는 지독한 잠꾸러기이다. 그 러나 스스로 이렇게 구체적으로 목표를 정해놓은 터 라 그것을 지키기 위 해 노력했고, 그 덕에 고등학교 3년 동안 개근을 하였다. 공부와 졸음은 왜 그리도 친한지, 천하장사도 졸리는 것을 참지는 못한다. 했기에 하루 백 번 이라도 세수하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졸리는 것도 참지 못하는 나약한 인 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애들에게는 꿈이 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희 망, 그 일들을 하기 위해 그 애들은 더 많이 배우고, 더 열심히 갈고 닦아 야 할 것이다. 그 긴 과정의 첫 단계로서 인식이의 1차 목표는 대학3학년 2학기에 미국 유학을 가서 우수한 성적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경 제학 교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득이의 1차 목표는 대학4학년 때 우수 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검사가 된 후 미국 유학을 가서 법학박 사 학위를 받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거쳐야 할 일들은 늘 인내의 시간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잊지 않기 위해 되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고되다면 고된 고교 시절을 보내면서 그 애 들은 작지만 구체적인 목표들을 써 붙여 늘고 나름대로 지켜내려고 노력한 것을 안다. 그것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님에도 나는 그 애들의 그 노력하 는 자세를 보는 것이 무엇보다 흐뭇했다. 그 애들이 앞으로의 삶에서도 그 러한 자세를 잃지 않기를 기도한다. 7. 내 아이들아, 위대한 꿈을 가지거라 나는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꿈을 심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위대한 꿈을 품게 하는 것 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쌍둥 이에게 늘 이렇게 말해왔다. '위대한 자녀들이여, 그대들은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다. 왜 그 큰 용기와 뛰어난 지혜를 잠자게 하는가? 나는 그대들을 믿는다. 지금 이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 꿈을 이루는 날까지 멈추지 말고 달리기로 하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믿어 주고, 격려하려고 노력하며 지냈다. 생각 이 이렇다 보니 자연히 아이들과의 갈등이 있을 때 그들의 말을 듣게 되 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생각이 다를 때는 설득을 했지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자신의 위대한 꿈을 달성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도록 단초를 만들어 주고 싶 었다. 그 하나가 위인전을 읽혀 그 마음가짐을 배우게 하는 것이었고, 더 중요하게는 어렵고 지치는 생활 속에서도 꿈들이 퇴색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었다. 그래서 평소 어질고, 의로우며,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를 말하곤 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나 자 신을 아끼듯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를 고민하자고 말이다. 타고난 조건이나 현재 처한 상황은 사실 그다지 큰 문제가 안된다. 어떤 마음을 품고 자라는가에 따라 살면서 부딪치게 되는 갖가지 어려움들은 극 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 큰마음을 품을 수 있는 얘기들을 들 려주고, 서로의 꿈을 새삼 일깨우면서 용기를 주는 말들을 주고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던 토막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5척 단구 에 아주 못생긴 얼굴을 한탄하지 않고, 오히려 글읽기와 무예 연마에 피나 는 노력을 다하여 귀주대첩을 성공시킨 위대한 강감찬 장군 이야기이다. 또 하나는 6조 판서와 대사헌을 지냈으며 , 20년 동안 고금에 없던 태평시 절을 여는 데 큰공을 세웠던 덕망 높은 황희정승 이야기이다. 평생을 초라 한 집에서 안방에 멍석을 깔고 가난하게 보냈던 그는 아들 황치신이 새 집 을 지어놓고 잔치를 베풀 때 '정직한 관리라면 그런 집을 지을 수 없느니 라'고 호통을 쳤다. 잔치는 시작도 전에 파했고, 황치신은 작은 집으로 이 사하며 나라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쌍둥이에게 위의 두 이야기를 해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악조건을 극복하 고 역사에 길이 빛날 지혜와 용기를 발휘한 강감찬 장군과 좋은 집은 나라 위해 바치고 멍석을 깐 초라한 집에서 초인적인 의지로 나라를 사랑하며 헌신 봉사했던 황희 정승 같은 이들의 핏줄임을 얘기했다. 그건 우리도 그 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거듭 나의 아들들에게 말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고 원망을 할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극기하며 꿈을 성취하 기 위해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고 어떤 분야에서든 위대한 인물 이 되어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위해 영원히 빛날 행적을 남기리라는 마음 가짐을 갖으라고. 8. 수학능력 시험과 대학 진학 쌍둥이의 중고등학교 성적 인식이와 인득이의 실력은 비슷해서 경신 중학교와 대광 고등학교를 다 니는 동안 번갈아 가며 전교 1,2등을 차지하곤 했다. 중학교 때는 동생 인 득이가 전교 1등을 더 많이 했고, 고등학교 때는 인식이가 전교 1등 인득 이가 2등을 했다. 초중고 12년 동안 쌍둥이가 받은 학업 우수상을 비롯한 각종 상장만도 150여 장이나 된다. 그건 아이들을 키우면서 얻은 나의 소 박한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위의 표는 쌍둥이가 고3이 된 1997년 4월 말, 셋이 모여 같이 세운 목표이 다. 이걸 세우고 나서 셋이서 목표 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손도장을 찍었다. 1997년 5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3학년 1학기 중간 고사가 끝난 후부터 6 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수학능력 시험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특히 7-8월 여름 방학 동안 목표 점수에 접근할 정도의 실력 배양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힘들었던 때는 여름 방학 때였다. 무더운 날씨와 참기 어려운 졸음 때문에 하루 열 번 이상 세수를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졸리는 즉시 자리 에서 일어나 하루 백 번이라도 세수를 하는 게 졸음을 쫓아내는 유일한 처 방이었다.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 다. 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커피를 하루 두 잔 이상씩 먹어보기도 했 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자기 전에 샤워하는 것은 피로를 풀어주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이때는 나도 쌍둥이와 함께 고3이 되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병든 몸이었지 만 영어회화 등을 학생이 된 정열을 가지고 공부했다. 미약하나마 애들에 게 도움이 되고 싶었기에 당장 소용이 되지는 않는 것임에도 열심히 공부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보 통 밤 2시에 함께 자고, 아침 6시 30분에 함께 일어났다. 쌍둥이는 내가 깨 우지 않으면 한 달도 계속 잘 수 있는 잠꾸러기들인지라 내가 힘들었던 것 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아마도 쌍둥이에게는 큰 힘이 됐을 것이고, 더 훌륭한 성적을 내려고 노력하는 동기가 되었으리 라 생각한다. 수학능력 시험일과 점수 1997년 11월 19일 수요일. 나는 쌍둥이와 함께 수학능력 시험 장소인 제기동의 성일 중학교에 시험 시작 50분 전에 도착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대광고등학교 선배님 힘내세 요'라고 쓴 현수막을 든 2학년 후배들의 상기된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인식아, 그리고 인득아, 오늘까지 정말 고생 많이 했다. 시험장에 들어가 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서 문제집을 푼다는 마음자세로 문제를 하나하 나 신중히 풀어가거라. 특히 수리탐구 영역 I에서 어려운 문제나 시간이 많 이 걸리는 문제가 나을 때는 눈에 확 띄도록 크게 표시를 해놓고 다음 문 제로 넘어가고 쉬운 문제부터 푼 다음에 풀도록 하여라. 우리가 목표한 점 수 이상 나오도록 시험을 잘 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는 실망 하지는 않을 것이다. 1년 더 노력해서 더 훌륭한 실력을 쌓으면 될 것 아니겠냐. 난 쌍둥이 너희들을 믿는다. " "네, 아빠. 이제 집에 가세요." "아빠, 너무 걱정 마세요." 교문 앞에 서서 서로를 격려하는 굳은 악수를 하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 다. 그것은 이제 한 고비의 정점에 서 있다는 것 때문에 밀려오는 안쓰러 움과 서러움이 교차된 감정이었을까... 인식이와 인득이의 눈가에도 눈물 방울이 살풋 서려 있었다. 사업 실패 후 뇌를 심하게 앓고 좌반신이 마비되어 옷도 자유스럽게 입지 못하는 처지가 된 아버지를 보는 그 애들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15년 동안 엄마 없 이 자라며 느껴야 했을 외로움은 얼마였을까? 궁색한 생활로 인해 겪게 되 는 불편함 또한 많았을 터인데 한번도 내색하지 않은 녀석들, 그렇게 타 들어간 가슴은 또 어떠했을까? 무슨 큰 희망이 라도 있는 양 곧 쓰러질 듯 초라한 몸을 이끌고 시험장까 지 온 나는 엉엉 소리내어 통곡할 것 같은 심정으로 쌍둥이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기도했다. "하나님, 인식이, 인득이에게 수학능력 시험에서 훌륭한 성적을 올릴 수 있 도록 지혜를 주시옵소서. 어머니란 말 한 번 못해 보고 자란 불쌍한 쌍둥 이인데, 저마저 사업에 실패한 후 병중에 있어 3년 동안 하루세 끼도 제대 로 먹이지 못했고, 제일 먹고 싶다는 피자 한 번 사주지 못했습니다. 좋은 옷 좋은 신 한번 사주지 못했지만 한 번도 불평불만하는 것을 보지 못했나 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 온 사람들 산에 오를 때 신으라고 준 딱딱한 흰 운동화를 몇 달 동안이나 신고 학교를 다닌 쌍둥이 입니다. 그 고운 마음에 지혜를 더해주셔서 휘청거리는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가 난한 백성 하나 없는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수능 발표일은 시험을 본 지 꼭 한 달 만인 12월 20일에 발표되었다. 아이 들의 점수는 인식이가 378.9점(백분위 점수 99.83점)이고, 인득이가 358.6점 (백분위 점수98.62점)이었다. 인식이는 그런 대로 목표했던 점수에 근접했지만, 인식이와 똑같은 실력을 가진 인득이는 목표했던 점수에 훨씬 못 미치는 점수가 나왔다. 시험 당일, 시험장 정문 앞에서 가슴으로 울먹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동생인 인득 이가 더 많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았 다. 나는 인득이가 너무도 측은해 보였고, 어떻게 해서라도 인득이의 마음 을 북돋아 주려고 노력했다. 막상 시험 점수가 발표되고 나니 그 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 고, 쌍둥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목끝까지 차 올랐다. 평범한 가정에서도 힘 겨워 하는 고3시절, 말은 안 했지만 그 애들의 정신적인 방황의 늪은 참으 로 깊었을 것이다. 사업에 실패한 것도 부족해 뇌졸중에 좌반신 마비로 불 구자가 되어 있는 아버지, 그걸 보는 일만으로도 그 아이들의 가슴이 얼마 나 갈기갈기 찢어졌으랴. 자연히 경제적인 어려움도 극에 달해 반찬이라고 달랑 간장 한 가지 놓고 밥을 먹을 때가 허다했고, 그나마 김치라도 있는 날은 풍족한 날이었다. 하물며 먹는 것이 이럴진대 입고 쓰는 것에 대해선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애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똑같은 도시락 통에 똑같은 반찬이 담긴 도 시락을 갖고 다녔다. 그나마 도시락을 싸갈 수 있는 걸 감사하면서 말이다. 친구들이 엄마의 따뜻한 정성이 담긴 도시락을 먹을 때 얼마나 엄마의 따 뜻한 손길이 그리웠을까를 생각하면 코끝이 맵기만 하다. 그 아이들의 허 한 가슴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었을까 게다가 고교 3학년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실낱같은 모정을 가슴에 담고 살 아오신 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겉으로는 표를 내지않고 의젓하게 넘기는 듯 보였지만 쌍둥이에게 있어 할머니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아는 터에 그 애통하고 텅빈 가슴을 어루만져 줄 길이 없었다. 그렇게 고교 3년간 나와 쌍둥이는 정말 어려운 시간들을 이겨내야만 했다. 열심히 대학수학능력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어야 할 많은 시간을 괴로워하 면서 시험 준비를 하였으니 계획한 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서로가 울먹이는 가슴을 참으며 내일의 희망을 눈물로 그려놓은 채 버텨냈 던 참으로 긴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를 붙들어 준 것은, 쌍둥이가 4살 때부터 날마다 노래를 부르듯 암기했던 두 명언이었다. '소년이노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극기는 최대의 승리다' 소년이 늙기 쉽고, 배워서 이루기는 어려우니 조그마한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극기하여야 크게 성공을 한다는 말은 누구인들 기억하지 못하 랴. 하지만 쌍둥이에게 그 높은 이치를 모두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다. 많은 것을 알려면 많은 시간을 아껴 활용해야 함을 알지만 만족할 만큼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욕망, 사 념, 충동, 감정 등을 의지로써 눌러 이겨야 한다는 가르침은 알고 있으되, 실천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애들이 대견스럽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을 불평없이 의지 와 노력으로 견뎌낸 그 하나만으로도 그지없이 대견스럽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목표했던 396점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쌍둥이의 정신과 마음 밭 에는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헌신 봉사할 굳건한 각오가 되어 있고,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애의 도리로 좌 채워져 있으니 그 값진 인성 점수를 합 산하여 인식, 인득이의 수능 점수는 400점 만점을 맞은 것으로 나는 다시 채점했다. 대학진학, 눈물을 닦아주겠다고 나선 이상일 총장님 "아버지, 오늘 학교에 서강대학교 총장님과 입학처장님이 우리를 보러 오셨어요." 1997년 10월 27일, 아이들이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돌아와 꺼낸 말이었 다. 아이들이 다니던 대광 고등학교로 서강 대학교이상일 총장님과 입학처 장님이 찾아와 인식이와 인득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갔다고 했 다. 쌍둥이가 서강 대학교에 입학하면 4년간 등록금 전액을 지급하고, 3학 년 2학기 때는 미국 유학을 보내주고,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학비 전액 을 장학금으로 지급하며 , 생활비도 지원하겠다는 말씀이었다. 물론 쌍둥이는 서울대나 연, 고대에 진학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수 학능력 시험도 보기 전에, 그것도 명문대학교의 권위있는 유능한 총장님께 서 직접 방문하여 학생 유치에 나섰으니 그 누가 감동하지 않겠는가. 그분들은 SBS의 '행복찾기' 프로그램 중 '아빠, 휘파람을 부세요'에 출연 한 쌍둥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명을 받아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셨다. 나는 참으로 기뻤다. 나의 아이들이 대견스러웠던 것도 있었지만, 다른 무 엇보다도 쌍둥이를 믿어준 총장님과 입학처장님께서 보여준 인간적인 믿음 개인 이기주의로 허황된 꿈만을 위해 투쟁하는 이 땅에 믿음을 선물한 것 이 너무도 고맙고 기뻤던 것이다.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나면서 사실 아이들에게는 갈등이 없지 않았다. 합 격 가능한 점수를 맞고도 꿈꿔오던 서울대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 았을 것이다. 두 아이들과 나는 많은 시간을 고민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 가,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가. 그것이 우리들 고민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내 생각과 아이 들 생각을 교환하며 필요할 때 설득은 했지만 어떤 강요도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평소토론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결국 아이들은 오래 고심끝에 서강대로 지원했다. 12월 27일 서강대학교 특차 합격자 발표날, 경제학과를 지망한 형 인식이는 전체 수석을, 법학과 를 지망한 동생 인득이는 법학과 수석을 했다. 그날 오후 서강대학교뿐만 아니고 옥상 가건물에 살고 있는 우리 집에도 방송국 및 신문사 기자들 3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인식, 인득이가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된 후 나와 세 사람이서 힘을 합해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펼 쳐 나갈 계획입니다. 살 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으뜸가는 학문을 갈고 닦아야 하겠 고, 그런 후에는 나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듯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고 사 랑하여 빈민과 범죄 없는 복지 국가를 만드는 데 헌신 봉사할 것입니다. 병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판잣집에 앉아 곧 터질 듯한 울음을 참으며 기자 들의 질문에 답변한 나의 소망이었다. SBS, KBS, MBC 저녁 종합 뉴스와 VTN 뉴스 등에 쌍둥이가 수석 합격 한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이어서 조선일보를 비롯한 모든 주요 일간지와 샘이 깊은 물 등의 월간지에도 쌍둥이의 수석 합격 기사가 실렸다. 경황이 없으면서도 가슴이 벅차 올랐다. 이 자체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치라도 우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종소리를 울릴 수 있음이 더없이 기뻤다. 우리에게 새로운 일 들이 생겨나면서 해가 바뀌었다. 1998년 2월 19일, 아이들이 드디어 대학생이 되었다. 서강대학교 입학식장 에서 인식이가 신입생 대표로 신입생 선서를 했다. 그리고 인식이와 인득 이는 약속대로 둘다 똑같이 한아름의 장학 증서를 받아왔다. 이 중에는 서 강 동문 장학회 장학 증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대학 재학 4년간 교내 학생 회관 식당의 중식 식권을 수여 한 것으로 개교이래 처음 지급하는 것이라 했다. 그날 거동이 불편했던 나는 입학식장에 참석하지 못했다. 모처럼 밝게 웃 을 수 있는 날, 사진 한 장 찍어주지 못하는 일이 못내 안타까웠지만, 내 가슴 가득 차오르는 아이들의 당당한 웃음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쌍둥이 의 앞날이 '시리우스 별'처럼 밝게 빛나 보인다. 9. 한문 공부는 필수 배움에는 '여기가 끝'이라는 게 없다. 아이들이 특차에 합격을 하고 난 뒤부터는 이제 앞으로 해나갈 공부에 대한 준비로 마음이 바빠졌다. 평소 에 한자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던 나는 두 아이의 공부에 있어 절대적으 로 필요할 한자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라고 일렀다. 경제학, 경영학, 법률학, 의학, 문학, 공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을 하는 데 필요한 참고서들이 거의 한문과 혼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일이 옥편에서 음과 훈과 획수를 찾아 가면서 참고서를 읽고 공부하자면 몇 배나 더 힘이 들고 많은 시간을 허비 하게 될 것이다. 그뿐이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는 데나 행정, 경영, 법관, 전문직업 등을 수 행함에 있어서도 한문의 중요성은 지대하다. 일본어를 익힐 때도 상용 3천 자는 해독하여야만 한다. 중, 고등학교에서 한문시간에 상용 한자 약간을 배우기는 하지만 실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1997년 9월 전국 49개 대학 61개 학과 졸업생 100명을 대상으로 실 시한 한자 4급 시험(한자 1000자의 훈과 음을 달고 500자를 쓸 수 있는 검 정시험)결과가 평균 29.5점에다 50점 미만이 89%를 차지한다는 기사를 보 고 더더욱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이름, 부모 이름, 학교 이름, 주소 등도 한문으로 쓸 줄 모르고, 조상이 누구인지 족보도 읽 지 못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대학 입학 전에 상용한자 3천 자는 자유자재로 음 과 훈을 달고 쓸 수 있도록 끈기를 가지고 반복 학습하여 영어 알파벳을 암기하듯 확실히 숙지하도록 일렀다. 정작해야 할 공부 앞에서 기본적인 것이 준비되지 않아 헤맨다면 목표달성은 요원해지지 않겠는가. 한문 생활권 속에서 형성된 우리 국어를 이해하고 동양 문화권의 조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도 한문 교육은 필요하다. 또 경제적으로 막강해져 가는 거대한 중국과 일본 등이 동북아의 한자 문화권에 있고 모든 공부는 뜻을 알아야 이해가 되므로 뜻글자로 되어있는 한문을 익힘으로써 학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위의 표 대수, 소수에서 보듯이 소수점 아래 수를 쓸 수 있는 자리가 128 개가 있고, 일 이상의 대수에 영을 128개나 쓸 수 있어 소수와 대수를 합 해 수의 자리는 256자리가 있다. 우리는 보통 경까지 사용하고 그 위 해부 터 무량수까지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뿐 아니라 소수 분부터 정까 지와 대수 해부터 무량수까지는 십진급수 단위명도 잘 모르고 있는 실정이 다. 나는 이 십진급수 표를 보고 있노라면 무엇보다도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 을 하게 된다. 세상의 오묘한 진리와 배워야 할 것이 십진급수만큼이나 끝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또 반 복해야 함을 당연시 여기게 된다. 그렇게 끈기를 가지고 이해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익힌다면 누군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내일 하면 되지'하는 식의 안일한 생각 이나 벼락 공부 방법에 의존하는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도 이 십진급수만큼이나 배울 게 많은 세상에서 단 1초라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일렀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시간 을 아껴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누구나 다 1등을 할 수 있고 만점을 맞을 수 있다. "세워진 계획대로 공부를 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므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달아라, '스케줄 핸드북'에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 가다 보면 그 속에 세워진 10가지 계획도 거뜬히 성취될 것이다"라고. 이제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통제해 자율적으로 학습해 나가야 하는 때가 되었으니 현재라는 이 순간은 10번을 후회한다 해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 는 귀중한 시간임을 마음 깊이 새기라는 말을 남겨주고 싶다. 제2장 행복을 쟁취하기 위한 나의 투쟁 1. 공원, 공중변소에서 새우잠 자던 꿈많던 소년 196B년 초여름이었다. 열여덟 살이 된 나를 축복해주듯 산과 들의 초목 은 온몸으로 초록의 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환영에 답하지 도 못한 채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달랑 기차표 한 장에 의지한 채 서울역에 도착한 내겐 텅 빈 김밥 도시락 통이 전부였다. 맨손으로 서 울 가서 공부해 큰 인물이 되겠다며 당당히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가 싸 주신 김밥이었다. 3일 동안은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거라 하셨는데 서울역 에 도착했을 때는 어찌된 일인지 김밥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쪼들리 는 살림에 학비 한 푼 대주지 못하니 그거라도 먹고 힘내라고 온 정성을 다해 만드셨을 테니 그 얼마나 맛있었으랴. 나의 꿈은 컸다. 1차 목표는 검사였고, 이후 링컨과 루스벨트 같은 훌륭한 정치가가 되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다해도 불타는 야망을 품은 채 대통령이나 된 듯한 기분으로 상경한 열여덟 소년이었으니 그 모 습은 얼마나 용기백배 했겠는가. 우리집은 대학 공부시킬 돈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 달 먹을 쌀도 사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부 모님께서는 농사나 지어야지 무슨 공부냐며 서울 가 공부한다는 말은 꺼내 지도 못하게 하셨다. 정히 서울에 가고 싶으면 맨손으로 올라가서 고생 한 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당신들 생각엔 며칠 못 가서 다시 시골로 내려와 농사 지을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 고 서울에 가도록 허락만 해주시고 완행열차비만 주시면, 서울 가서 성공 하려 기필코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성공 하지 못하면 고향을 친지 않겠노라고 큰소리까지 쳤다. 그러나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디서도 나를 환영하는 손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예견된 고생길이었음에도 막상 닥쳤을 때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5일을 굶었다. 그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우거지 국밥이 5원이었다. 중부 시장에서는 수제비국과 선지국밥도 5원이었는데, 당장 5원짜리 수제비국 한 그릇도 사먹지 못하는 주제에 공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막막하기만 했다. 잠은 공원 공중변소 대변실에서 잤다. 남이 보다가 버린 신문지를 주워서 툭툭 털어내고 바닥에 깐 뒤 벽에 등을 기대고 양발을 뻗은 채 잠들곤 했 다. 밤 12시에 대변실 침실에 들어가면 새벽 4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나야 한다. 혹시 관리인이나 경찰관의 눈에 띄면 끌려가 죄인 취급받기 쉬우니 말이다. 또한 대중이 이용하는 장소이니 시민을 불편하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마음이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건 경험해보 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포근한 침실이기도 했다. 숨쉴 때마다 밑에서 솔 솔 올라오는 냄새는 고기 굽는 냄새요, 소변실에서 문틈으로 살살 들어오 는 냄새는 주방의 생선 굽는 냄새였고,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마치 쇠고기를 구워 놓고 가족끼리 다정하게 둘러앉아 꿀꺽꿀꺽 맛있게 삼키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막막함을 달랠 길은 없었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통령이 되고자 꿈 에도 그리던 서울에 왔건만 상경한 첫날부터 공중변소 신세를 지게 되었으 니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고 다시 시골로 내려 갈 수는 없었다. 일단 1년간 무슨 일이라도 해서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찼다. 우선 1차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법학 공부를 할 결심을 하고 책 외 판원이 되다. 나의 첫 직장에서 처음 교통비를 받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지 금까지도 그때만큼 돈의 귀중함을 절실하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일을 하면서 급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동대문에서 영등포까지의 거 리는 보통 걸어다녔다. 회사에서는 조금씩이나마 교통비와 중식대가 나왔 지만 그것까지도 아껴모아 공부하는데 보태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불탔던 것이다. 나는 항상 달렸다. 하루 평균 100리는 더 걷고 달렸을 것이다. 퉁 퉁 붓고 물러 터진 발은 상한 생선토막 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강인한 의지력과 체력을 갖게 되었고, 계속 달릴 때 인간의 한계 거리라는 마라톤 풀코스 105리를 매일 달릴 수도 있었다. 배가 고플 때는 서울 장안 에서 가장 싼 음식점을 찾아다녔다. 시장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5원짜리 국밥 집이나 수제비국 집을 찾아다녔다. 어쩌다 보면 저녁때쯤 되어서야 점심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족끼리 즐겁게 나들이하는 모습을 본 나는 순간 멍해지는 걸 느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나 자신이 너무도 작아 보였다. 뭉클거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렇 게 한참 동안을 멍하니 서 있다가, 사정없이 계단을 뛰어올랐다. 힘들 때나 외로울 때 휴식처가 돼 주었던 남산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남산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성냥각을 늘어 놓은 것 같은 수많은 집들이 보였다. 그 러나 위안을 삼기 위해 올라간 그곳에서 오히려 내가 잠들 곳이라고는 공 중 변소나 공원의 한 구석뿐임을 시리게 자각해야 했다. 추워지면 시장에 서 가마니를 주웠다. 그것을 이불 삼아 서리를 피해야 하는 현실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될 뿐이었다. 그렇게 남산 하늘 아래에서 물끄러미 서울 시 내를 내려다 보고 있자니 꾹꾹 눌러두었던 서러움이 봇물처럼 터져 올랐 다. 어머니가 지어 주시던 따뜻한 밥과 포근한 이불이 어찌나 그리운지 내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그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독한 마음으로 눈물을 감추었다. 그런 절망 을 안고 귀향할 수는 없었다. 나는 부모님 앞에서 서울에 가 공부해서 훌 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큰소리치며 약속하던 나를 떠올렸고, '대통령이 되겠 다는 꿈을 가진 대장부가 뭐 이런 것들 때문에'라며 나를 위안했다. 나는 더 악착같이 일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책을 팔러 다녔 다. 조금이라도 학자금을 더 마련하기 위해 방을 얻지 않고 공원과 공중변 소 생활을 이어 나갔다. 큰 나무를 지붕삼고, 점잖게 자리잡은 큰 바위는 어머니 품인 양 여기며 항상 걷고 달렸다. 그렇게 1963년 새해 봉을 맞았 다. 상경한 지 1년이 지난 것이다. 거친 잠자리와 피곤에 절은 몸에도 불구 하고 당시 나의 마음은 천지를 소유한 채 살고 있었다. '황희 정승은 영의 정을 지내면서도 멍석을 깐 초라한 집에서 생활했지 않은가. 나는 아직 약 관의 나이도 되지 않았으니 자고 있는 곳이 내 집이요, 발 닿는 곳이다. 내 땅이다'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있던 나는 국민 1인당GNP 3 만 달러 시대에나 가능할 살기좋은 나라 설계도로 과 차 있었다. 그 당시 GNP는 87달러에 불과 했던 시절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꿈이 참 가상 할 뿐이다. 억만금을 준다해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통해 수양한 나는 8개월 만 에 하숙생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 동안 피눈물 나게 모 은 돈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나는 계속 책 외판 원을 하면서 법학과 한의학을 공부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대옥편 에 나오는 실전 한문을 모두 외우기도 했지만, 하면 할수록 세상에 배울 것이 너무도 많아 내가 아는 것은 보잘 것 없는 갓난아기 걸음마에 불과했 다. 하지만 작으나마 내가 배운 것이 행복 1번지에 세워질 건물에 차곡차곡 쌓 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한편이 뿌듯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노력을 통해 얻은 것을 온 세상 사람과 더불어 멋지고 아름다운 미래를 건설하는 데 바치고 싶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2. 2층 양옥집에 살고 싶어 50단의 담배를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다 나는 고학으로 법학을 공부하는 동안 재활원에서 자원 봉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에만 의지한 채 걷는 소년, 양발이 다 잘려 몸통만 있는 아이, 두 발로 걷기는 하지만 두 다리 모두 뒤틀어져 디스코 춤을 추며 걷는 아이, 두 다리는 멀쩡한데 몸을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며 걷는 소년 등 수백 명의 불구자들을 보았다. 그들 중엔 돌봐줄 부모가 없 는 아이들도 있었고, 부모님이 계셔도 병을 고쳐주어 앞길을 인도해줄 만 한 능력이 없어 그대로 있어야만 하는 청소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깨끗 한 마음을 가진 어린 소년을 불구자라며 매정하게 길거리에 버려 하루아침 에 노방초가된 소년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운명을 한없이 원망하며 울고 또 울어 더 이상 흘릴 눈물마저도 모두 말라버린 이들이었다. 그 재활원에서는 한쪽 다리에만 의지한 소년에게는 구부러진 다른 한쪽 다 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여 양발로 걸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약 3 개월간 걷는 연습을 시켰다. 다른 소년들도 가능한 한 그들의 처지대로 병 을 고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병원비는 모두 무료였다. 그런 후 시계 기 술, 양재 기술 등을 무료고 가르쳐 일류 기술자가 되게 하여 자영업도 하 고 인정받는 기능인으로 취업도 하였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참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같아 보였지만 아름답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값진 삶 을 개척해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나는 공원 등에서 노숙할 때 맨손으로 서울에 보낸 부모님을 한없이 원망할 때도 있었고, 왜 우리집은 남들처럼 부자가 아니냐며 투덜거릴 때 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구자가 된 몸으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한 채 잘 살아보고자 애쓰는 청소년들을 본 뒤부터 나를 건강 한 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함을 느 꼈다. 내 어찌 그 높고 넓은 부모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리오만은 어떻게 해서라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재활원 봉사활동 이후로 내 마음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검사를 거쳐 대통 령이 되겠다는 나의 장래 희망이 바뀌었다. 공부를 마치고 '빈민 없는 나 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전개하여 가난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병들고,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헌신 봉사하는 삶 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1965년 21살이 되던 해 나의 생일날, 나는 내 스스로 '충'자 배지를 만들었 다. 중심을 잃지 않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항상 잊지 않기 위해 그 배지 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닐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내 머리 속에는 온통 빈 민과 범죄 없는 평화로운 우리나라의 설계도로 꽉 차 있었다. 1967년 초여름, 내 나이 23살 때였다. 청파동 숙명여자대학교 근처를 지나 가다가 깨끗하고 예쁜 이층 양옥집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리 넓지는 않지 만 잘 가꾸어진 정원이 딸린 아담한 집이었다. 그 집에서는 따뜻하고 아늑 한 행복의 기류가 달콤하게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무심코 멈춰 서서 바 라보고 있던 나는 마냥 그 기류에 감염되고 싶었다. 5년 동안 공원과 하숙 집 좁은 방에서 생활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던 나에게 그 집은 마치 부드러 운 꿈속의 성처럼 보였다. 나도 저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문득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빈민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국민 운동을 전개하려면 먼저 나부터 내 힘으로 굳건히 일어서는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빠른 속도로 치달았고, 나는 우선 그 집같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무엇 일까를 고민했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 바로 이것이구나!' 나는 손뼉을 치고,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를 지르며 혼자서 기뻐했다. '50단 의 담배 농사'를 1년만 지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담배 농 사는 한 농가에서 3단(900평) 정토를 경작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그 평 수의 약 17배나 되는 50단의 담배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일반 농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담배 농사 1단(300평) 을 지으면 평균 순수익이 10만 원 정도였으니, 50단의 담배 농사를 지으면 500만 원의 순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당시에 500만 원이면 현재 몇 억 원하는 이층 양옥집을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담배 농사 50단을 지으려면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 둘째 담배 농사 기술, 셋째 노동력, 넷째 밭 1만5천 평 이상, 다섯째 건조실이 3동 이상, 여섯째 충분한 퇴비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걱정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당장에 서울의 모든 생활을 중단한 채 즉시 시골집이 있는 충북 보은으로 내려갔다. 그 당시 나의 용기는 전쟁터로 나가는 장군과 같았다. 먼저 가족 회의를 했다. 1년 담배 농사를 지은 후 서울에다 이층집을 한 채 구입한 뒤 아버지와 어머니 를 내가 모시고서 두 동생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고, 형은 선산 등의 관리 문제도 있고 하니 농사를 지으며 고향 땅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물론 온 가족이 50단의 담배 농사를 성공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조 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기술 문제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충청북도에서 담배 농사 를 잘 짓는 최고의 기능인으로 선정되어 몇 차례나 상을 받으셨던 분이었 기 때문이다. 노동력 문제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지금은 영농 기계 기 술이 발달하여 기계로 농사를 짓지만 그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의 손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과 집안 아저씨와 아주머니 두 사 람 그리고 나를 합해 모두 11명이나 되었다. 또 잘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애처로운 나의 모습에 감동한 동네 사람들도 협조하기로 하여 그보다 큰 농장도 경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엽연초를 말리는 데 필요한 건조실 마련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예전부터 우리 집에서 사용하던 것이 한 동 있었고, 나머지 두 동은 이웃에 사는 5 촌 조카네 텃밭에 흙벽돌고 새로 짓기로 했다. 혹시 건조실이 부족할 경우 에는 가까이 지내는 이웃 분들의 건조실을 빌려 사용하기로 하였다. 우리 고향 마을에는 전통적으로 담배 농사를 많이 지어왔기에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밭 1만5천 평이었는데, 그것엔 어머니와 내가 나섰다. 인근 마을에 묵혀 두었던 땅의 주인들을 찾아다니며 1년만 사용하겠다고 사정했다. 그 분들은 내 뜻을 알고 감동을 받으셨다며, 그분들 농사에 우리가 며칠 정도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조건으로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애초보다 많은 약 2만여 평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다음 퇴비, 다음 해에 담배 농사를 지으려면 금년 여름에 룰을 썰어서 썩혀야 했는데 그것쯤은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1967 년 초여름부터 새벽에 나가 저녁 해질 때까지 하루에 다섯 짐의 풀을 하였 다. 그리하여 90일 동안 도합 450짐의 꿀을 하였다. 내 체격은 큰 편은 아 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기운이 세기로 유명했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선배들도 나를 이기지 못했다. 아기 씨름대회에 나가 계속해서 19명을 이 긴 적 도 있었다. 내가 풀 한 짐을 해오면 황소 한 마리가 실어다 놓은 것만큼이 나 된다고들 하였으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그 당시 풀베 기 대회에 선수로 나가신 적도 있었는데, 나도 아버지를 닳았는지 타고난 일꾼이었다. 그때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연탄이나 기름 등의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여 름에 철나무를 하여 쌓아 두었다가 1년 동안 밥지을 때나 방을 데울 때 사 용했다. 철나무란 산에서 풀을 베어 말린 다음 짝으로 묶어 쌓아두고 연료 로 사용하는 것인데 철나무 한 짝을 만들려면 생풀 두 짐을 말려야 한다. 나는 다음 해에 담배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할 철나무도 같이 해두었다. 60 일 동안 혼자서 150짝을 했는데, 생풀로 따지면 300짐이 된다. 농촌의 상일 꾼들 몇 명이 해도 어려운 일을 나 혼자서 해낸 것이었다. 참으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벽 4시, 나는 서둘러 일어나 찬밥을 조금 떠먹고 5시가 되면 낫 세 자루 를 지게에 꼽고 산을 올랐다. 꼬불꼬불 험한 산길을 따라 철나무를 할 장 소까지 가는 데는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오전 10시쯤 되면 아버지께서 오전 샛밥과 점심 그리고 오후 샛밥 세 끼 먹을 밥을 지게에 짊어지고 그 높은 산까지 올라오셨다. 고생되시니 내가 새벽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가겠다고 해도 아버지는 편찮으실 때를 제외하 고는 손수 밥을 가져다 주셨다. 그러면서 못난 자식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다 못해 눈물을 보이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제구야, 너는 그렇게도 잘살고 싶으냐, 불쌍한 자식" "아버지, 저는 저 혼자 잘살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예요. 아버지, 어머 니를 좋은 집에서 잘 모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저와 같이 공부하고 싶어도 가난해서 마음껏 공부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불쌍한 사람 하나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먼저 저부터 모범을 보이려는 거예요. 아버지, 저는 정말 살기좋은 나라를 꼭 이루고야 말 거예요"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는 나를 덥석 끌어안고 부끄러우신 줄 도 모르시고 흐느끼셨다. 나도 아버지를 부등켜 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 다. 부자간의 이 울음은 잘살기를 소망하는 가난한 이들의 기도이자, 우리 가 앞으로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충분히 있음을 증명해주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보통 점심을 가져다 주시고 조금 앉아 계시다가 산을 내려가시곤 했는데 , 하루는 저녁때까지 같이 나무를 하시다가 나와 함께 내려가시겠 다고 하셨다. 나는 해가 질 무렵 먼저 베어 놓아 잘 마른 나무를 짝으로 묶어 한짐 지고 앞서 내려왔다. "제구야, 조심하거라. 길이 가파르구나." "아버지 , 걱정 마세요. 제가 하루 이틀 다닌 길인가요." 뒤에 따라 오시던 아버지가 하시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며 말했는데, 그 순 간 나는 이미 약 30m쯤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를 돌아 보는 순간 큰 짝나무 짐이 비탈길 옆 나뭇가지에 걸리면서 나뒹굴어 낭떠 러지로 떨어진 것이다. "제구야!" "아버지!" 신발은 신발대로, 낫은 낫대로 날아가 버렸고, 갈기갈기 찢어진 옷은 나뭇 가지에 걸려 축 늘어져 있었다. 휘둥그래진 눈으로 비탈진 험한 길을 단숨 에 내려오신 아버지는 눈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씀하셨 다. "제구야, 제구야, 죽으면 안 된다. 그 고생을 하고서 뜻도 펴보지 못하고 죽으면 되겠느냐. 제구야, 괜찮니?" 정신을 못 차리는 내 얼굴을 두드리며 불쌍한 자식이 죽은 줄 아시고 당황 해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식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하는 아버지 의 마음에 지금도 눈시울이 뜨겁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 나무짐을 다시 지고 어두컴컴해서야 피투성이가 된 채로 산을 내려왔다. "제구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니? 이 무슨 꼴이란 말이냐. 독한 사람, 독한 사람..."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고 이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시며 또 다시 우셨다. 그렇게 안기는 순간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따라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부자가 끌어안고 흘린 그 눈물은 결코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건, 희망을 달성 할 수 있다는 확신의 울음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도 열심히 한 덕택에 가장 어려웠던 퇴비를 충분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나머지 다른 문제들도 모두 해결하여 만반의 준비를 완 료하였다. 이제 앞으로 1년만 고생하면 서울에 가 꿈에도 그리던 아름다운 이층 양옥집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꿈꾸던 대로 어려 움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빈민없는 나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펼치 며 멋진 삶을 가꾸어 나갈 초석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밑그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내 꿈의 밑등에 꽃힌 비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날아왔다. 추석 명절 전날 밤이었다. 우당 탕 쿵쾅, 장독 깨지는 소리며 이리저리 각종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 했다. "야, 이놈 제구야, 너 혼자만 잘살겠다. 이거지, 나만 시골 구석에 처박아 놓고 너만 서울에 가서 좋은 집 사가지구 잘살겠다. 이거지. 공부 좀 했다 고 형을 무시해. 이 놈" 술에 만취한 형의 갑작스런 행동에 우리는 너무도 놀랐다. 가족회의에서 고향을 지키며 농사 짓고 살겠다고 합의했던 형이 순식간에 폭력배로 돌변 하여 온갖 살림을 부수며 행패를 부리고 있으니 그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 가. "너 이놈 제구, 이 집에서 썩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 빨리 꺼지라구, 이놈 아." 형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모든 가족을 곧 죽여버릴 듯이 포악한 자세로 마 당 한가운데 저서 발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형은 밤새도록 미친 사감이 날 뛰듯 한바탕 폭동을 일으켰고, 평화롭고 희망이 가득찼던 집안은 전쟁터의 폐허처럼 되어 버렸다. 몰살이 나서 끙끙 알을 때, 땅벌에 쏘여서 부어오른 얼굴이 하마처럼 되었 을 때,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때도 나는 쉬지 않고 일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드디어 담배 농사에 필요한 준비를 완료해 놓았는데, 형의 행패 로 인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자신만 시골구석에 처박아 놓고 다른 모든 식구들은 서울에 가서 살겠다고 하니 형은 장남의 체면상 말은 못하고 속알이를 해왔던 것이다. 그것이 막상 현실로 이루어 져 파는 것이 보이니 모든 게 불안하게만 다가왔을 것이다. 지금이야 형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때 술기운을 앞세워 저질렀던 형의 행동은 결국 한 청년의 무럭무럭 자라는 꿈의 새싹을 잘라놓고 말았다. 추석날 새벽, 서늘하기만 한 서울행 열차는 고향을 벗어나고 있었다. 낮은 촉수의 전등이 켜진 열차 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몸을 웅크린 나의 모습은 벼락맞은 소나무 같았다. 그렇게 고향을 떠났기에 나는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토록 나 를 사랑해주셨던 아버지는 내가 떠나고 나서 몇 년 뒤 중풍으로 자리에 눕 게 되셨고, 3년 동안 고생하다가 돌아가셨다. 3년을 앓는 동안 아버지는 내 내 나를 찾으셨다고 한다. "제구야, 제구야 ." 손과 발을 떨면서 방안을 걸어다니시면서 3년 동안 부르신 노래 제복이 내 이름 "제추야, 제구야 하였다니... 아버지는 그리운 자식 이름으로 작사, 작 곡을 하셨던 것이다. "제구야, 제구야..." 수십만 번도 넘게 부르셨을 한이 담긴 그 목소리, 지금도 이 못난 불효자 의 귓전을 울리며 가슴에 한의 웅덩이를 만드는 그 목소리... 형님은 1997년에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알콜 중독자가 되어 허 무한 인생을 살다가 떠난 형님, 원망과 미움만이 남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 그렇게 가시니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떠난 후 그 동안 해 놓았던 퇴비 는 폭군 형님이 10년 동안 농사를 짓는 데 쓰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걸 쓰 면서 형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젠 사무치는 그리움으로만 남은 날들 이여... 3. 15년동안 2만 번도 넘게 울었다 마음의 연인 1982년 겨울,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서울 거리는 평화롭기만 했다. 그러나 1939년생인 한 여인은 생사의 기로에서 식물 인간이 되어 누워서 대소변을 보았다. 쌍둥이 생모의 모습이다. 두툼한 요를 깔아주고 솜이불을 덮어주면 그냥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불 빨래를 해야 했 다. 이렇게 매일 반복되는 생환이 1년쯤 지났을 때 쌍둥이 생모는 혼자서 벽을 잡고 한 발 두 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나와 쌍 둥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정신이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후 정신 질 환자 수용시설에서 10년 이상을 생활했고, 지금까지 질기고도 질긴 모진 운명과 싸우며 70살이 넘은 할머니의 몰골을 한 채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쌍둥이 생모를 만난 것은 1972년 부산에서였다. 그때 나는 28살 총각이었 고, 쌍둥이 생모는 7살이나 연상인 35살의 이혼녀였다. 그녀의 왼쪽 팔은 손목부터 팔꿈치까지가 오른'팔 굵기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 모습은 마 치 반쯤 타다 남은 통나무 같았다. 그리고 기관지 천식이 심해 계단을 올 라갈 때는 숨을 헐떡거리며 힘들어했고, 몇 번을 쉬어야 했다. 그러던 그녀 가 쌍둥이를 낳은 뒤 몇 년 후 식물 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나한테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여인이라고 말을 했는데 자식을 낳은 것이다. 기구한 운명치 방향추를 따라 약혼식도,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쌍둥이의 아버지가 된 뒤 15년이 넘도록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쌍둥이를 혼자서 키 워야 했다. 한 번 엮어진 인연이 평생을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려는 착한 사람이었다. 나는 하루 평균 다섯 번 이상을 울었다. 나만 의지한 채 철모르고 자라는 쌍둥이의 애처로운 모습을 볼 때, 하루 세 번의 식사시간, 잠자리에 들 때 와 일어날 때, 그리고 부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엄마 손을 잡고 즐거이 나들이 나온 가족들의 모습을 볼 때... 거기 다가 단 1개월도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해보지 못한 처지였지만 병마와 투 쟁하고 있는 쌍둥이 생모의 처절한 모습이 생각날 때마다 내 가슴은 갈기 갈기 찢어졌고, 삶의 회의를 느끼곤 했다. 쌍둥이를 혼자 키워 온 15년 동 안 저렇게 2만 번 이상은 울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눈물을 다 모으면 한 강 하나는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쌍둥이는 언제나 행복한 듯 밝게 자라고 있었다. "쌍둥아, 엄마 보고싶지 않니?" "아니, 난 아빠만 있으면 돼 . 아빠가 최고야." "나도 아빠가 최고야, 엄만 필요없어..." 다섯 살 난 인식이는 오른손. 인득이는 왼손을 잡고 시장에 반찬을 사러가 면서 물을 때면 언제나 엄지 손가락을 하늘 높이 쳐들고 초롱초롱한 눈망 울을 빛내던 나의 아이들, 삶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하는 쌍둥이의 당당한 행동에서 희망을 읽어내며 나는 용기를 되찾곤 했다. 3년간의 고난은 나를 거듭나게 했다 1994년 5월 쌍둥이가 경신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점포 임대업과 유통업 및 몇 곳의 음식점을 경영하던 나는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고 말았 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사무실과 점포 등 모든 재산도 압류 처분되었 다. 불황의 상태에서 믿었던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한 것이 화근 이 되었다. 나는 배신감과 무력감에 몸을 떨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 다. 나의 사업 실패로 인해 평화로웠던 우리 집은 순식간에 채권자들의 전 쟁터가 되어버렸다.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빛을 갚았지만 얼마간의 채무가 남아있어 채권자들 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날이면 날마다 여러 명의 사채업자들이 찾아 와 당장 죽이기라도 할 듯이 폭력을 휘두르며 짐승처럼 행패를 부렸다. 참 으로 견뎌내기 힘든 날들이었다. 하루 하루가 지옥 같았기에 날이 새는 것 이 두려웠다. 쌍둥이와 나는 하루 세 끼를 연명하기도 힘들었다. 지친 심신을 이끌고 이 곳에서 저곳으로 피해 다녀야 했고, 쌍둥이가 남의 집에 얹혀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공부에 전념해야 할 쌍둥이에게 매일 못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나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실제로 몇 번을 죽으려고도 했었지만 엄마도 없이 자란 불쌍한 쌍둥이를 두고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설상가상으로 나는 뇌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점점 심해져 뇌가 터질 것 같이 악화되다가 결국 좌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밤만 되면 수십 번씩 폭발할 것 같은 뇌를 움켜잡고서 신음 소리를 죽이려 입술을 깨 물어야 했다. 겨우 진정이 되고 나서 쌍둥이의 잠든 모습을 쳐다보고 있노 라면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옷도 마음대로 입고 벗지 못하는 처지가 되 었으니 이 노릇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자존심 하나 만을 믿고 살아 온 나, 누구에게 찾아가 하소연 하나 못하는 주제에 무엇을 하여 먹고 살 것 인가, 어떻게 하여 쌍둥이를 가르칠 것인가... 그 아득한 막막함은 한밤 어둠 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두려 움의 늪으로 빠져들기만 했다. 왜? 왜 내게 이토록 중한 벌을 내리시는가? 나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이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나는50평 생을 욕심부리지 않고 살아왔다. 나처럼 어려움을 겪으면서 꿈을 키워가는 이들과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해 빈민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소망을 가꾸 어 왔고, 그 운동을 펼쳐 나갈 기금을 마련하려고 애써왔다. 그리고 작은 힘이나마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 남들을 돕고 살았다. 방세가 없어 갓난 아기를 데리고 쫓겨나야 하는 실업자 신혼부부에게 방을 얻어 준 적도 있 었고, 빛에 몰려 노부모와 함께 거리로 쫓겨나야 하는 영세 상인에게는 장 사 밑천을 대주어 새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병원비가 없어 눈수술을 받지 못해 실명 위기에 처해 있는 가난한 부부를 도와 다시 밝은 눈을 되찾게 해준 적도 있다. 또 처가 식물인간이 되어 가정을 이끌어 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한 가장에게는 자격증을 획득하여 전문 직업 인이 되도록 도왔다. 그가 공부만 할 수 있도록 생활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내가 이런 고통의 늪에서 허덕여야만 한단 말인가? 생각할수 록 가슴에 탑을 쌓는 절망감은 실제의 고통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 다. 그러나 그렇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나의 불쌍한 아이들, 쌍둥이 앞에서 당 당한 모습으로,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들 곁에 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가 해내야 할 몫이기에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그러 나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온통 뭉클거림으로 가득차 버리곤 했다. 가슴이 울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것들을 돈으로 바꾸는 일뿐이었다. 오랫동안 보물처럼 간직해 온 금시계를 팔고 중앙시장 에서 만 원짜리 시계를 샀다. 그림을 팔고, 반지를 팔고, 기념 메달이며 책 등을 모두 팔았다.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귀중품들을 모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슴이 한 조각 한 조각씩 비어져 나가던 날들의 흔적은 쌍둥이의 골동품 도시락에도 고스란히 서려있다. 물끄러미 쳐다볼 때면 지금껏 마음이 아파 눈길을 돌리게 만들곤 하는 골동품 도시락 통을 쌍둥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들고 다녔다. 하루는 인식이가 들고 가고, 다음날은 인득이가 들고 갔다. 높이 20cm에 둘레가73cm나 되는 플라스틱 도시락통 은 5인분용으로 가족 나들이 할 때 쓰는 것이었다. 보충 수업을 할 때는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둘이서 먹어야 하니까 물론 도시락 통이 대형이기는 해야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3년 동안 사시사철 보 온도 되지 않는 낡은 나들이용 대형 도시락 통을 들고 등교하는 일은 아이 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을까? 그렇지 않아도 쌍둥이라서 튀는 편인 데, 대형 골동품 도시락 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타나니, 친구들은 멀리서 대형 골동품 도시락 통만 보고도 쌍둥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고들 한다. 그 러나 쌍둥이는 그 도시락 통을 한 번도 부끄러워해 본 적이 없다. 도시락 반찬이 맛없다고 투덜거린 적도 없었다. 오히려 나의 마음을 상하 게 해주지 않으려고 항상 맛있다고 호들값을 떨었다. 점심 시간, 도시락 통 을 열면 언제나 계란 부침 몇 조각이 들어있고, 그 옆에 어떤 때는 참치 캔 1개, 어떤 날은 김치 조금, 또 다른 날은 고추장과 계란 부침 몇 조각... 이것이 고교 3년 동안 싸준 도시락 반찬 명세서의 전부이다. 나는 아침이면 항상 계란을 부쳤다. 한창 먹을 나이에 부실하게 먹고 공부 하다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그치지 않았지만 별달리 뾰족한 수는 없고, 고심 끝에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계란부침 이었다. 그나마 영양가 풍 부한 계란만이라도 꼭 먹여야겠다. 고 생각했다. 다행히 계란은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계 란 부침은 꼭 싸주었고, 집에서 먹을 때는 계란짐을 해주었다. 나는 집에서 간장 하나 놓고 먹는 한이 있어도 쌍둥이에 겐 계란만이라도 꼭 먹이고 싶 었던 것이다. 하지만 3년을 똑같은 반찬만 가지고 다니는 일은 분명 짜증스러운 일이었 을 것이다. 녀석들, 단 한 번도 내색은 안 했지만 점심 시간마다 다른 친구 들이 별생각 없이 꺼내 놓는 엄마들이 예쁘게 싸준 맛있는 도시락을 쳐다 보면서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 작은 도시락에 곁들여진 소박한 행 복들을 보며 느꼈을 부러움은 얼마였을 거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또 얼마있을까... 그렇게 나혼자 울게 하던 녀석들... 그 녀석들이 고교 3학년 때 신고 다니던 흰 운동화 역시 늘상 내 가슴을 젖게 만들곤 한다. 그건 그해 4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 온 사람들 에게 산에 올라갈 때 신으라고 준비한 것이었다. 쌍둥이는 3개월 동안이나 그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먼저 신고 다니던 운동화가 떨어져서 물이 샌 지 이미 오래였던 차에 멋쟁이 새 운동화를 얻었다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학교에 신고 다녔다. 친구들은 모두 유명 메이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데, 산소에 오를 때나 신는 딱딱한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일이 혹여 부끄럽지 는 않았으랴...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냥 신고 다닐만 하니? 발 안 아파?" 내가 넌지시 물으면 녀석들은 오히려 이런 대답을 했다. "괜찮아요. 유명 메이커 운동화만 신고 다니려는 친구들은 왜 그런지 모르 겠어요." 안쓰러움과 대견함이 엉켜들었다. 불쌍한 쌍둥이가 신고 다닌 그 운동화를 보면서 마음이 아플 때마다 불효자였던 나는 쌍둥이 할머니의 영혼이 영원 토록 축복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생활 속에서 쌍둥이들이 견뎌야만 하는 소소한 불편함은 곳곳에 널려 있었 다. 그 애들에겐 책상이 없었다. 집과 사무실 및 점포와 물건 등이 경매 처 분되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애들은 고 교 2학년 때부터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볼 때까지 둘이 한 밥상에서 공부를 했다. 반지름이 37cm밖에 되지 않는 원형 밥상에 왕성한 성장기의 쌍둥이 둘이서 머리를 마주한 채 2년 동안을 그렇게 공부했다. 자유스러운 공간에 서 정신을 집중하고 공부해도 모자를 시기에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서로 머리가 부딪치고, 발을 양(梁)을 수도 없는 좁은 밥상에서 그 애들은 기특 하게도 잘 참고 공부를 했다. 그러나 아버지인 내 입장에서는 공부한다고 쌍둥이가 밥상을 펴고 접는 모 습을 볼 때마다 칼로 오장육부를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나 자신에 대한 회한과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지금도 잠들 때면 가슴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도 너무나 많은 속을 태웠기에 그렇지 싶다. 시간이 지날수록 특별한 경제력이 없는 우리 집 사정은 더욱 나빠져만 갔 다. 그래도 그 동안은 어떻게든 끼니는 거르지 않고 잘 견뎌왔는데, 쌍둥이 의 대학수학능력 시험일을 두 달 앞둔 추석 무렵이 되어서는 도시락에 담 을 계란 하나 살 돈도, 전철 회수권 한 장을 살 돈도 없었다. 귀중품이란 귀중품은 다 팔아서 더 이상 팔 물건도 없었던 것이다. 저마다 좋은 옷으로 갈아입고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즐거이 고향을 찾는 추석, 2천만 명 이 대이동을 한다는 명절인지라 사람들은 4일간의 연휴가 마냥 짧게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 연휴는 고통스럽게 길 었다. 우리의 추석엔 좁은 방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올려 논 간장 종지 하 나가 전부였던 것이다. 덩그마니 놓인 간장 종지의 흰빛은 눈이 아리도록 처량했다. 누구도 숟가 락을 들지 못했다. 나도, 인식 이도, 인득이도... 물끄러미 간장 종지를 바 라보고 있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젖은 침묵이 고이고 있었다. 정지화면이 풀리듯 아이들은 고개를 젓고는 호들값을 떨며 숟가락을 들었다. "아, 맛있다 그치? 맛있지?" "정말 맛있다." 쌍둥이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형을, 제 아우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느라 한껏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즐거운 척 떠들어 댔지만 우리 중 누구도 즐겁지 못했다. 밥과 눈물이 뒤범벅 되었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서로를 부여잡고 울었다. 실컷, 실컷 울었다. 그 쓸쓸했던 1997년의 추석, 그 기억은 잊혀질 수 있을 것인가... 추석 연휴가 끝나도 달라질 수 있는 건 없었다. 쌍둥이는 전철탈 돈이 없 어 용답동에서 신설동까지 수도 없이 걸어다녔다. 한 짐 되는 책가방에 대 형 골동품 도시락 통을 짊어진 그 애들의 등하교 길에 동행하는 그림자는 늘 무겁게만 보였다. 내가 겪는 고통보다도 자식들이 겪는 고생이었기에 마음이 더 갈기갈기 찢 어졌으리라. 그러나 그럴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쌍둥이에게 희망과 용기 를 불어넣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쌍둥아, 우리는 지금 불시착한 거야. 기름이 떨어지고 엔진이 고장나서 기 름을 가득 채우고 고장난 기계를 수리할 때까지 잠시 머물렀다. 가는 중이 란다. 그러니 보람되고 행복한 내일을 위해 지금은 열심히 갈고 닦자 " 아빠, 걱정마세요.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경험인 걸요." "저는 의지력이 좀 강해지는 것 같아요. 지금 겪는 우리의 현실을 밑거름 삼아 멋진 앞날을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빠만 건강하시면 좋겠어 요." "그래 너희들의 생같이 그러하다니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른다. 지붕 에서 새는 빗물이 비록 오수라 할지라도 그것을 생명수로 바꿔 가난한 백 성을 살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우리 셋이 힘을 합해 보자꾸나. 너희들은 꼭 링컨 대통령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으로 믿는다. " 그랬다. 우리 세 사람은 질대 원망하며 주저앉지 않았다. 인생의 긴 여정에 서 보면 지금의 이 고생들은 고통의 업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과 나의 인 간적인 면모를 성숙시켜 줄 것이라 여기니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다는 용 기가 생겼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건 결코 가난한 사람들의 삶 을 비웃고 경멸하는 일은 없으리라,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보낼 줄 아는 사람으로 크지 않겠는가, 경험하지 않고는 느낄 수 없는 일들이 있음에 이 것은 산 교육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기와 격려일 뿐이 다...' 바닥을 깎는 듯한 3년간의 고통은 내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사항을 목표삼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첫째, 담배와 술을 끊는다. 둘째 50평생 살면서 내가 잘못했던 일들을 모 두 반성하고 그동안 나에게 잘못 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한다. 셋째, 모든 일에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애를 바탕으로 최선을 다하고, 힘들고 어려 울 때 극기하며, 낙관적이고 능동적이며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나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듯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생각하고 사랑한다. 넷째, 쌍둥이 를 교수와 검사가 되게 하고, 세 사람이 힘을 합해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펼친다.' 일단 첫째 목표대로 나는 하루 세 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애주하던 술도 1995년 7월부터 끊었다. 그랬다. 나는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라는 소망을 품고, 그 꿈을 50대 고개에서는 이루기 위해 그 준비 기금을 마련하기 위 한 사업을 펼치다가 실패했다. 하지만 3년간 아이들과 함께 겪은 이 고통들은 오히려 아이들과 내가 '함 께' 꿈을 이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눈물로 꺾은 가슴이 마를 날 없었던 시간들이 오히려 아이들 가슴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심 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음에 감사하며, 이제 나의 소중한 아이들과 함께 그 꿈을 이루자고 다짐하며 손가락을 건다. 1997년 1월 1일 쓴 유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그 악화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져 갔다. 급기 야 좌반신이 마비되었고, 그 상태에서 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폭발할 것 만 같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며칠씩 식사도 못 할 때가 많았다. 1996년 12월 10일 나는 이 날짜를 잊지 못한다. 사정없이 달려드는 죽음에 의 두려움이 피부로 느껴지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방안에 웅크 려 있다가 도저히 통증을 견딜 길이 없어 찬물을 끼얹어 보려고 옷을 입은 채로 수도관 앞 세면장으로 갔다. 그 비좁은 세면장 수도꼭지에 고무 파이 프를 연결하여 머리부터 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좌반신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처지인데다 며칠을 굶은 탓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순간 나는 세면장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건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다. 일어나려고 발버 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수도꼭지를 끌어안고 사정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와 죽기 싫어 발버둥치는 황소와 같았다. 아무도 없었다. 도움을 청 할 이 하나 없이 나 혼자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시멘트 바닥에 고꾸라져 정신을 잃은 채 한참 동안을 생사의 기로에서 허 우적거리던 나는 영혼만이라도 살아나 불쌍한 쌍둥이를 보살펴 주어야겠다 는 일념 이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일을 겪은 후 한치 앞의 내가 의지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내게 머물렀다. "쌍둥이는 어쩌란 말인가, 그나마 내가 없어지고 나면 이 불쌍할 아이들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말하지 못하는 내 가슴엔 피멍이 들었고, 막막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하루를 넘겼고, 또 하루를 버텼다. 나의 터질 듯한 뇌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불안은 나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유서를 남기게 했다. 1997년 1월 1일, 사람 들이 새 희망을 한아름 품는 새해 첫날이었다. 별이란 이름을 가진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구 나에겐 특별한 친구가 하나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나는 밤을 기다리곤 한다. 슬플 때나 외로울 때 그리고 뉘우칠 때나 소망을 설계할 때 나는 항 상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면 그는 가만히 내 가슴을 쓸어주며 따뜻하 게 웃어주곤 한다. 그를 만난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집 옥상에서였다. 그를 처음 만난 날, 내가 그에게 지어준 이름이 있다. '시리우스 데네브', 밤하늘을 쳐다볼 때 가장 밝은 빛을 뿜고 있는 제일 큰 별이다. 은하계에는 약1천억 개의 항성(붙박이별)과 행성(떠돌이별)이 있는데, 항성 중에서 가장 밝은 것이 8.8광년 거리에 위치한 '시리우스'란 이름을 가진 별이고, 가장 밝은 별 순위 20위 내에서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한 것이 1630 광년의 '데네브'란 이름을 가진 별이다. 1광년만도 억겁의 시간으로 느껴지 는데, 1630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데네브'별은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천 지만물의 조화가 신비로움을 새삼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빛나는 별과 그 빛나는 별들 중 가장 먼 별의 이름을 합쳐서 내가 만난 그 친구별에게 '시리우스 데네브'란 이름을 붙여 주게 된 것이다. 내 친구별은 흐린 날을 제외하고는 다른 때에 비해 유난히도 밝게 빛났다. 매일 밤마다 옥상에 나와 앉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음을 달래는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위로는 따뜻했고 믿음직스러웠다. 별 도 위치나 형태가 변하기는 하지만 사람의 마음처럼은 변하지 않는다. 어 떠한 것을 고백하고 약속해도 비웃거나 배신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나는 '시리우스 데네브'와 약속을 했다. 영원토록 변치않고 세상의 밝은 빛이 되 겠다고, 그런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나는 지금도 외롭지 않다. 또한 가난하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언제나 나를 축복해 주고 있는 별친구, '시리우스 데네브'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둠 을 밝히며 나와 내 소중한 아이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땅을 지켜주며 아 름답게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찾기와 축복 기도 1997년 10월 16일, 옥상 우리집 단칸방에는 전에 없이 열 명도 넘는 사 람들로 꽉 찼다. SBS TV '행복 찾기' 프로그램 중 '아빠 휘파람을 부세요 ' 부분을 촬영하기 위하여 SBS 교양국 '행복 찾기'팀 PD안수현 씨와 탤런 트 전원주 씨 그리고 10여 명의 촬영팀들이 옥상 판잣집으로 찾아왔기 때 문이다. 가난한 가정 형편에 좌반신 마비로 누워 있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쌍둥이 는 나모르게 각 방송사와 신문사에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띄웠다. 그건 보 잘것 없는 자기를 드러내야만 하는 일들이니 주저함이 없지 않았을 텐데, 불보듯 뻔한 내일의 불안이 그 애들로 하여금 쉽지 않았을 그런 결정을 하 게 한 것이다. 기대감과 초조감으로 기다리던 그 애들에게 SBS TV '행복 찾기' 팀에서 연락을 해주었고, 드디어 이날 촬영하러 왔던 것이다. 막상 이야기판이 벌어지니 50평생에 알알이 맺혔던 숱한 회한과 응어리들 이 봇물처럼 터져버렸다. 아이들 생모가 쌍둥이를 낳고 몇 년 뒤 식물 인간이 되었죠. 한 발 두 발 걸을 수 있도록 회복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어 가출했어요. 그후 15년 동 안을 나 혼자 쌍둥이를 키우면서 수만 번을 울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쌍둥이에게로 옮아가 중,고등학교때 전교에서 늘 1,2등을 번갈아 가며 차지했고, 학교 생활을 한 12년 동안 학업 우수상을 비롯한 각종 상을 150여 회나 수상했다는 자랑으로 이어졌다. 쌍둥이를 유치원이나 어떤 학원에도 보내지 않았고, 과외를 시킨 적도 없 었어요. 4살 때부터 집에서 내가 한글을 가르쳤는데, 한국 및 세계 위인전 을 앉혀 인, 의, 예, 지, 신, 충, 효, 애를 바탕으로 한 사람다운 사람이 되 도록 가르쳤지요. 나 자신을 생각하고 사랑하듯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생 각하고 사랑하라고... 그 아이들, 고생 많이 했습니다. 책상도 없이 고개를 조금만 숙여도 서로 머리가 부딪히는 좁은 밥상에 둘이 마주 앉아서 공부 했어요. 고교 3년 내내 가족 나들이 할 때 사용하는 5인용 대형 골동품 도 시락 통을 창피함을 무릅쓰고 들고 다니면서도 기죽지 않았죠. 도시락 반 찬도 다를 바가 없었어요. 쌍둥이의 건강을 위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인 계란 부침이 3년 동안 도시락 반찬의 다였어요. 그걸 맛있다고 먹었지요. 또 상가집에 문상 온 사람들 산에 오를 때 신고 가라고 준비할 딱딱한 흰 운동화를 3개월 동안이나 학교에 신고 다니면서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어요... 밥할 쌀과 전철 회수권 살 돈이 없어 불안해하며 하루 하루를 살기도 했어요 .1997년 추석 연휴 때는 반찬이라고 오직 간장 한 가지 뿐이었는데, 그걸 놓고 일주일을 견뎠지요... 이 방의 방세가 월 30만 원인데, 7개월째 밀려 있으니 보증금 200만 원을 다 제하고 나면은 부족한 형편이지요. 내가 평생을 모은 돈을 아는 이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했어요. 불경기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업에 실패한 거죠. 그후 집과 사무실 및 점포 등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빛을 같았지만 상당한 채무가 남아 있었죠. 그 고통을 참아 내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사채 업자들로부터 비인간적 으로 겪은 수모는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어요. 아이들이 그때 상처를 많 이 받았죠. 작년에 투신 자살한 중학교 3학년생 김진윤 군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라 곧 쌍둥이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사업 실패후 뇌졸중에 좌반신 마비란 꼬리표를 달고 다니면 생사의 기로에 서 헤맸던 그때 유서까지 쓸 지경이었으니... 1997년 1월 1일 쓴 유서에서 내가 죽거든 꼭 화장을 하라고 쌍둥이에게 부탁했어요. 단 세 평의 묘지나 마 차지할 만한 일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도 감사 한 건 우리 세 식구가 좌절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기 보다는 희망에 찬 꿈을 수놓곤 했어요. 막상 유서를 쓰고 보니 이런 결심을 하게 되더군요. 살아나야겠다. 건강해 져야겠다... 그래서 새벽에 1시간, 낮에 1시간, 밤에 1시간 하루 3시간씩 333일 동안 999시간 기도를 올렸어요. 진정으로 기도했습니다. 은혜로운 하 나님은 제 손을 잡아주셨지요. ...외로움이 없었다면 거짓이겠죠. 하지만 물리치려고 애를 썼어요. 저의 친 구별과 대화하며 가슴에 소망을 한아름 간직한 채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내 가 최고 부자이고 1천억 개의 별친구를 가졌는데 무엇이 부럽겠느냐고 큰 소리 땅땅 치며 견뎠어요. 나의 평생 소원은 가난한 사람 하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21 살 때인 1965년부터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충'자 배지를 만들어 지금까지 32년간 항상 가슴에 달고 다닌답니다. 아이들이 고생은 많이 겪었지만 그랬기에 아이들이 저와 같은 희망을 품게 되었고, 이제 함 께 이뤄나갈 거라는 생각을 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2시간여 촬영하는 동안 온 방안이 바다를 이루었다. 나의 먹먹한 가슴이 터지면서 전 원주 씨가 내 손을 잡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고, 안수현 PD를 비롯한 촬영팀 모두의 울음보가 터졌다. 그렇게 촬영된 '아버지, 휘파람을 부세요'는 1997년 10월 25일 오전 11시에 방영됐다. 차선규 씨와 김창숙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본 시청 자들 중에는 쌍둥이와 아버지의 슬픈 행복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신 사람 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너무나 많은 분들이 도 움과 격려를 보내주셨다. 김치에, 김이며, 빵, 반찬 등은 물론이고 따뜻한 편지에 전화 등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해 준 손길이 많았다. 여러 모로 도 와주신 그 많은 분들께 무엇보다도 그 따뜻한 마음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그런데 우리를 도운 분들은 결코 많은 것을 소유한 이들이 아니었다. 아이 들과 나는 이 과정에서 새삼 많은 것들을 배웠다. 부자이거나 가진 것이 많은 이라야 남을 돕는 것이 결코 아님을, 돈도 명 예도 없지만 가난을 아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도울 줄 안다는 사실을, 마음의 부자로 살아가는 일이 결코 물질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말이다. 그건 우리 세 식구에게 많은 느낌을 남겼다. 행복을 찾기 위해 눈물로 쓴 편지를 읽고 높은 꿈을 향해 비상할 수 있도 록 쌍둥이에게 행복의 날개를 활짝 펴 준 300여 분들 앞에서 쌍둥이와 나 는 조용한 다짐을 한다. 잊지 말자고, 고마운 분들을 꼭 기억해서 우리도 그분들처럼 남을 돕고 살아갈 줄 아는 이들이 되자고, 그리고 그 은혜를 갚는 길은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임을 새기자고 그리고 나는 조용히 기도 드린다. 그분들 한분 한분을 위한 축복의 기도를. "쌍둥이에게 희망과 용기의 갑옷을 입혀준 분들과 그 가족 모두에게 지금 부터 영원토록 무량수배로 은혜를 주시옵소서, 온 가족이 건강하고 사랑이 충만한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축복하시고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성취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자녀들은 어질고 의롭고 예절 바르며 지혜롭게 자랄 수 있도록 이끌어 주 시고,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다운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축복하시옵소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아름답고 만족한 삶을 연출하며 사랑의 밧줄로 가 정을 엮어 멋을 창조하면서 즐거운 인생을 설계하도록 축복하여, 평생토록 보람되게 살 수 있도록 지켜주시옵소서. 그들의 후손들도 대대로 만사 형통하고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축복 하여 주옵소서. 저와 쌍둥이도 고마우신 분들의 뜻을 마음 깊이 새기고 나라와 이웃을 위 해 헌신 봉사하며 꼭 빈민 없는 우리 나라를 만들수 있도록 큰 힘을 주옵 소서. 쌍둥이에게 사랑의 등불을 밝혀주신 모든 분들께 한없는 은혜가 항 상 함께 하도록 기원하나이다." 좌반신 마비도 고쳐주신 주님 1996년 12월 10일 세면장에서 쓰러져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에 나는 천당 과 지옥을 오가며 많은 이들을 보았다. 성경책이나 역사책에서 알았던 많 은 사람들을 보았고, 먼저 간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험상궂은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차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보았다. 나는 그 속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 다가 깨어나 보니 죽을 힘을 다해 수도꼭지를 움켜잡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얼마를 더 살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에 아이들 앞으로 유서를 남기기까지 했다. 그 리고 나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쌍둥이가 1차 목표를 이뤄 대학교수와 검사가 되어 나와 함께 빈민없는 나 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펼처보기도 전에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 고 사경을 헤매던 그 잔은 시간 동안 지옥 불 앞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던 나를 떠올리며 그동안 내가 원망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50평생 잘못했던 일들을 뉘우치며 용서를 빌었다. 기도를 올리기로 결심했다. 나는 정실을 모아 333일 기도를 드렸다. 1996년 12월 12일부터 1997년 11월 9일까지 333일 동안 매일 해가 뜨기 전에 1시 간, 해가 떠 있는 낮에 1시간, 해가 진 뒤에 1시간 등 하루 3시간씩 333일 동안 999시간의 기도를 드렸다. 333(완전숫자 3삼위일체) x 3(새벽, 낮, 밤 의 완전숫자 3시간)= 999(영원숫자9삼위일체)를 참고하여 정한 기도 시간 이다. 주님은 자비의 손길을 뻗어 주셨다. 내 기도에 응답하시어 지난 일들을 모 두 씻어주시고 나를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신 것이다. 문등병자도 낫 게 하시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시며 소경에게 앞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죽은 사람도 다시 살리시는 주님께서 나를 고쳐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참으로 보잘 것 없고 가난하고 병들어 불쌍한 처지에 놓여있 던 나였지만 마비되었던 좌반신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폭발 일보 직전에 있던 뇌 대사도 부활하여 활동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을 되찾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가슴 가득 평온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나를 다시 살게 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을 주님께 바친다. 4. '충'자 배지와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 내 옷깃에는 언제나 조그마한 황금색 배지가 하나 달려있다. 가족과 이 웃과 나라를 의미하는 세 개의 둥근 원 안에 '충'자가 곧게 새겨진 배지이 다. 그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내 소망을 지켜나가기 위해 21 살 나이에 내 손으로 만든 것이다. 그 배지를 지금까지 32년간 항상 가슴 에 달고 다녔다. 그 '충'자 배지는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항상 중심을 잃 지 않고 실족하지 않게 지켜주었다. 가운데 중자와 마음 심자가 합해져서 충성 충자가 되었듯이. 소년 시절 나의 희망은 검사를 거쳐 링컨이나 루스벨트 같은 훌륭한 정치 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학을 공부하며 재활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된 뒤 마음에 큰 변화가 있었다. 검사를 거쳐 대통령이 되겠다는 나의 장 래 희망이 바뀌었던 것이다. 21살, 내 소망은 '가난한 사람 하나 없는 나라 만들기' 펄 바뀌었다. '빈민 운동가'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공부를 마친 후 '빈민 없 는 나라 만들기 국민 운동'을 전개하여 가난하고, 병들고, 불우한 처지에 놓여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데 헌신 봉사할 각오 를 세웠던 것이다. 그렇다. 그건 지난 세월 가슴에 품고 살아온 나의 소망이다. 내 삶이 다하 는 그날까지, 부조리한 현실이 변하는 날까지 더욱 뜨겁게 품고 실천해 갈 소망이다. 그리고 나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하며 지내왔다. 사업을 하는 틈틈이 조그만 모임들을 만들어 그 이름으로 실천해 왔었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나의 모든 꿈들은 좌절되 어 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의 생각이 여전하고, 나의 의지가 굳건한 이상 당장 실천의 길에 올라있지 못할 뿐 나는 그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나의 아이들을 곧고 올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해왔던 것도 보다 큰 울 타리 속에서 보자면 바로 이 길에 나의 아이들과 함께 서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 많은 관심과 주의를 기울인다. 그 리고 그 부당함에 분노한다. 우리의 살아있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TV 뉴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들이나 새벽이면 어김없이 가정마다 배달되 는 신문의 면면마다 실린 기사들은 나와 같은 힘없는 서민들의 분노를 발 하게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서민들은 평생을 세도 다 셀 수도 없는 수십억, 수조 원의 부정한 돈을 뇌 물로 주고받은 사람들, 술값이 수백만 원씩이나 하는데도 예약을 하지 않 으면 자리가 없어서 들어갈 수도 없는 술집이 득시글한 땅 억대 도박으로 물의를 일으킨 이들이 오늘 또 다시 판을 벌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런가 하면 돈을 주고 산 가짜 박사가 전국 대학에서 버젓이 고개를 들고 수없이 많이 활동하고 있고,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도 박사 과정을 졸업하 는 데 등록금 이외에 교수 접대비로만 등록금의 몇 배의 돈이 지출된다는 뉴스를 보고는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1997년 한 해 동안 탄생한 국내 박사 가 4,792명이고, 국외박사가 6,991명인데, 이들이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어 떤 형태의 머슴살이를 살았을 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내 자식들이 그런 방식으로 학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걸 납득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참으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통탄할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97년 9월 추석 연휴 바로 다음날 중 학교 3학년이던 김진윤 군의 자살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했다. 직장에서 산업 재해로 돌아가신 아버지 가출한 어머니, 어머 니가 남긴 빛 때문에 채권자들로부터 받는 심한 빛독촉, 12평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중1짜리 동생과 단둘이서 그걸 이겨내야 했던 진윤 군은 겨우 열여섯 소년이었다. 쓸쓸한 추석 연휴, 아버지의 차례상도 못 차린 채 갈 곳 없는 두 형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들에게 주위의 무관심은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불러왔을 것이다. 결국 삶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소년 가장은 임대 아파트 14층에서 뛰어 내렸다. 불행과 가난에 대한 서러움을 피로 써놓고 꽃다운 나이 열여섯 소년은 그 렇게 사라져간 것이다. 1997년 10월 현재 우리 나라 생활 보호 대상자는 약 140만여 명이나 된다 고 한다. 그 중 거택보호자가 19만6천여 명이고, 시설 보호자가 7만5천여 명, 자활보호자가 103만9천여 명으로, 전 인구의 3.14%나 되는 것이다. 제 2, 제3의 진윤 군의 죽음은 이미 예견되어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역 등에 있는 홈리스 피플의 수도 수백 명이 넘는다. 이들 중에 는 걸인과 알콜 중독자만이 아니라, 육체 노동자인 블루칼라도 있고, 대학 이나 대학원을 나온 화이트칼라도 있으며, 사업 실패로 인한 충격에서 벗 어나지 못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가족을 보기 가 부끄러워 지하도에서 신 문지 한 장에 몸을 의지하고 거지 아닌 거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며 칠씩 굶는 것을 당연시하며, 눈물로 세수하고 서러움을 억제한 채 말이다. 전국 적으로 따지면 얼마나 많은 홈리스 피플이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행 복한 날을 되찾기를 꿈꾸며 고통속에서 방황하고 있을지... IMF한파로 인 해 고용 조정 등을 겪게 된 실업자도 1998년도에 100만 명 이상이 늘어날 예정이어서, 전체 실업자 수가 약 200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하나 그 가족 까지 합한다면 고통을 겪게 될 수는 약 60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다. 실업자가 된 초라한 아버지가 가출한 어머니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모습을 일기장에 빽빽하게 써넣던 자식들은 북받치는 서러움을 참다못해 일기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절규한다. 사업에 실패한 후 간신히 얻은 직장마저 부도가 나서 실업자가 된 아버지 는 대학에 합격한 아들의 등록금 200만 원도 마련하지 못하는 자책감 때문 에 견디다 못해 목을 매 자살했다. 앞으로 사업 실패나 고용 조정을 통해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생목숨을 끊고 화목했던 가정이 파괴될 것인지 생 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같은 IMF외환 위기 시대에 살면서도 고금리 정책 덕분에 이자만 연간 5억 원 이상을 챙기는 큰손 예금주가 2만 명이나 되며, 이들은 계좌당 약 27억 원의 예금을 보유하고서 저축성 예금이나 금 전 신탁, CD 등을 활용하여 고금리 시대를 만끽하고 있다. 또 대한민국 전 체의 땅 중 30대 재벌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땅은 전국토의 4.1%에 해당하 고, 그것도 대체적으로 금싸라기 땅이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수백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평의 땅도 없고, 사글셋 방 한 칸 갖지 못한 이들 역시 부지기수이다.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 당하 는 이들 이 수천억 원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있는 것이 다. 참으로 부익부 빈익빈을 절감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이 이러한데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니까 라며 무심하게 버려둘 수는 없다. 이 땅은 결코 잘사는 사람들만의 나라가 아니지 않은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도태되거나 불행해서는 안된다. 게으르니까 가난한 것이라 는 윽박은 이제 더이상 먹혀들지 않는다. 정책이나 제도를 통하여 지긋지 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란 훌륭한 정치가는 탁월한 지도력과 노력으로 쓰러져 가는 나라 살림을 다시 일으키고 어지러 운 사회를 바로잡았다. 그는 뉴욕 주 주지사였을 때 '뉴욕주는 뉴욕 주민들 의 것이다. 만일 주민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주민의 생활이 어렵게 되 었다면 이들을 구제할 책임은 주에 있는 것이며, 또 주민은 주정부에 그 구제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어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을 펼쳤다. 공장의 녹슨 기계는 다시 우렁차게 돌아갔고, 절망 속에서 맥을 놓고 있던 미국 사람들은 큰 용기를 되찾았다. 크나큰 위기에서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미국은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강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의 경제 난리도 슬기롭고, 용기있게 헤쳐나가고자 한다면 분명 현명한 방법은 있을 것이다. 나라를 뒤덮고 있는 불안과 고통의 암울한 먹구름을 걷어 내고 국가의 장래를 위한 도약과 희망의 문을 활짝 열어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누구를 위한 정책 이고, 어떤 삶을 향한 노력인가' 라는 부분일 것이다. 지금 같은 때에도 그렇다. IMF 체제 극복을 위하여 고용조정 법제화가 피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하더라도 사용자는 고용 조정을 최대한으로 줄이려 고 노력해야 한다. IMF 위 기 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가장들을 우후죽순처 럼 내몰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고용 조정 요건은 긴박한 경 영상의이유가 있어야 하고(경영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 인수 합병도 포함) 또한 판례가 인정해 온 경영악화의 계속, 생산성 향상을 위 한 작업 형태의 변경, 업종 전환, 기업이 부도에 직면했을 때, 외국에서 새 로 기술을 도입했을 때 일부 부서의 축소시에 가능하다. 기업의 양도 인수, 합병 시에는 고용이 승계 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다. 기업의 양도, 인 수, 합병을 집단 해고 사유로 규정 한 나라는 없다. 이 어려운 때 권력과 명예와 부를 가진 사람들이 금고에 잠자고 있는 금괴 와 돈을 모두 나라 살리는 데 쓰도록 내놓을 수는 없는 걸까? 빈손으로 왔 다가 빈손으로 갈 우리는 백살까지 살며 억만금의 재산을 소유해도, 죽어 서는 동전 세 개 들고 갈 힘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유산으로 받은 돈이든, 자수성가하여 번 돈이든간에 힘을 가진 이들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복받으며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나라를 바라는 것은 참으로 꿈이기만 한 것일까 '아무리 높은 자리에서 큰일을 하고 부자가 되고 명성을 세상에 떨쳤다고 해도 그 사람됨이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면 개나 돼지나 소 같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을. 무엇보다도 큰 소원'이라고 미국의 제 20대 대통령 가필드가 초등학교 시절에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자식들에게 '녹슬고 좀먹은 수전노의 돈지갑 대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담긴 수기 한 권'을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그 수기 를 읽은 후손들의 가슴에 더없이 귀한 유산을 남기게 되는 것 아닐까. 필요한 건 가진 자들의 공동체 의식과 봉사 정신이다. 불행한 처지를 보고 그냥 외면할 수 없는 홍익인간 정신,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많은 재산을 모아 지키는 것은 항상 불안하고 또한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지만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데서 얻는 기쁨은 만족한 삶을 더욱 빛나게 해줄 수 있다. 행복이 무엇인지 그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나눔 속에서 얻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함께 잘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노 력하는 일, 그것만큼 아름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빈민들도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가족과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며 행 복한 내일을 위해 참고 견디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안일한 생각 만 하고 게으름 피우며 나라에만 의존한다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라는 누 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불우한 처지만을 탓하며 멈춰 있지 말고, 강인한 집념으로 씻겨 내면서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열심히 일 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행복과 위대한 삶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 게 언제나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1998년 2월 19일 쌍둥이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 우리는 '빈민없는 나라 만 들기 국민 운동 협의회'를 발기했다. 내가 1965년에 '빈민 없는 나라 만들 기'를 기획한 이후 30년이 지나 이제 나의 소중한 아이들과 함께 그 일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나의 벅찬 가슴은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쌍둥이들도 아마 다 알 수는 없었 을 것이다. 우리는 정의롭지 않은 것에 분노할 줄 알면서, 가난한 사람 하 나 없는 우리 나라를 만드는 그날까지 함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헌신 봉사 할 것을 다짐했다. 내가 '빈민 없는 나라 만들기'라는 다소 거창해 보이는 소망을 품고 있다 해서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10년이 걸 릴지, 100년이 걸릴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요원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한 낱 유토피아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바르게 살려는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정의와 사랑이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는 때를 기원하며 나부터 한 알의 씨앗으로 심어지고 싶은 소망을 실천할 뿐이다.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충'자 배지를 문지르며 나와 같이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서 살아가겠다는 내 의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다. 이 땅은 나의 아버지가 살아온 땅이고, 내가 살아 온 곳이며 무엇보 다도 나의 아이들, 나의 미래가 살아갈 땅이기에. 앞으로 아이들에게 또 내게 어떠한 일들이 닥쳐올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눈물로 가르쳤던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 한 뜻을 품고 가치있는 일을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분명 우리 삶에 커다란 기둥이 되어줄 것임을 알기에 나는 당당히 가슴을 편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셨던 분들을 우리 기억의 노트에 새기기 위해 여기 한 분 한분 적어본다. 임송자 님, 김영자 님, 문일타 님, 이훈재 님, 우경희 님, 우주현 님, 정규성 님, 조혜현 님, 한순귀 님, 오은영 님, 박윤정 님, 김정순 님, 이종이 님, 박 순임 님, 오다혜 님, 이승온 님, 김귀순 님, 김문정 님, 박효자 님, 오정옥 님, 임용옥 님, 사계영 님, 공순연 님, 공기순 님, 이현정 님, 최순화 님, 김 영자 님, 김종환 님, 홍순옥 님, 정성교 님, 박동섭 님, 최명희 님, 윤병열 님, 손정수 님, 조영화 님, 유성자 님, 최순희 님, 이계희 님, 김순복 님, 안 덕명 님, 김도미 님, 박주연 님, 유순애 님, 안인선 님, 이지현 님, 위재곤 님, 이수련 님, 이원화 님, 유종현 님, 박수경 님, 조희자 님, 오영미 님, 임 정배 님, 권윤주 님, 촹겅연 님, 주소은 님, 한화인 님, 김진선 님, 최은숙 님, 오현정 님, 한예수 님, 정연자 님, 임양선 님, 백호정 님, 김미석 님, 정 순현 님, 시정애 님, 안순옥 님, 김여희 님, 김종환 님, 박희서 님, 임인숙 님, 최은띠 님, 유영란 님, 류순남 님, 복재수 님, 한성이 님, 김정감 님, 언 영애 님, 김순치 님, 추정일 님, 황금자 님, 문경애 님, 정규철 님, 김형인 님, 이인순 님, 박영숙 님, 조혜숙 님, 이애경 님, 홍정민 님, 최창규 님, 유 준희 님, 김행자 님, 최관주 님, 김영자 님, 유경순 님, 송홍식 님, 윤정자 님, 심상옥 님, 박재선 님, 안호선 님, 이규창 님, 김광옥 님, 이용욕 님, 박 은정 님, 이창숙 님, 이복남 님, 변춘권 님, 박현주 님, 강복희 님, 조엮주 님, 복수정 님, 조소영 님, 성용자 님, 김순옥 님, 김기진 님, 장희영 님, 이 강훈 님, 유보선 님, 이승주 님, 이지은 님, 김경아 님, 하윤주 님, 김형만 님, 조정여 님, 권수현 님, 전명희 님, 이영숙 님, 이순덕 님, 황상연 님, 최 선호 님, 오명수 님, 이숙자 님, 박세열 님, 양난숙 님, 김천애 님, 김은숙 님, 서대희 님, 고춘화 님, 마옥자 님, 임점숙 님, 오정희 님, 배준우 님, 박 순희 님, 탁철오 님, 최혜정 님, 이승온 님, 이상호 님, 이태숙 님, 고춘화 님, 이영숙 님, 김수언 집사님, 문영애 집사님, 황정자 집사님, 아셀라 님, 진데레사 님, 박마리아 님, 최순복 누나, 조소영 누나, 정동화 누나, 김 훈 동생, 명희 어머니, 혜지 어머니, 성아 어머니, 장위동 아주머니와 그 이웃 아주머니, 계란 아주머니, 김치 아주머니, 포항(성명 미상), 동원교회(용두 동), 성답교회(응답동), (주)은하관, (주)삼원식품(해찬들) 오형근 회장외 임직원 일동, 프로방스 제과점, 제흥한의원, 그리고 쌍둥이의 방송 출연 및 보도에 수고하신 모든 분들.